[필라비] 인생을 사랑한다는 건 가장 어려운 사랑을 하고 있다는 의미

 

인생을 사랑한다는 건 가장 어려운 사랑을 하고 있다는 의미 (22/8/7)

 

 스트라디바는 지루하게 스마트폰의 액정을 두들기고 있었다. 테이블 건너편에 앉아 있는 파트너가 뭐라고 주절거리든 조금도 귀담아 듣지 않은 채로. 이쯤되면 사실상 이미 마음은 정리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이대로 그만 만나기로 하고, 마지막으로 들어줄 말 들어주고, 연락처에서 싹 지워버리고. 그 다음엔 바이바이. 그렇게 마음을 먹었음에도 듣기 짜증나는 어조로 계속 이어지는 목소리가 견딜 수가 없어서, 스트라디바는 절로 인상을 구겨버렸다.

 “……대체 뭘 어쩌라고?”

 “그렇게 나오시겠다? 그럼 내가 이 이상 뭘 해야 하는데?”

 대뜸 흘러나온 말에 스트라디바는 불쾌함을 감추지 못했다. 누가 저더러 뭘 해달라고 하기나 했으면. 하여간 이래서 징징거리기나 하는 새끼들은. 제 아무리 취향이 아니더라도 스트라디바는 나름대로 끝내기 전까지 파트너에게 할 만큼은 하려고 애썼다. 그래도 아닌 건 아닌 거지. 아무리 놀 사람이 없어도 그렇지 아니나다를까 너무 생각이 어린 사람은 이래서 안 된다. 얘랑 얼마나 어울려줬더라? 스트라디바는 잠깐 생각에 잠겼다. 2주쯤 했으면 오래 버텼다고 할 수 있겠다. 오늘까지만 상대해주고 역시 보내버리자, 라고 결심한 순간에.

 “너 양다리야? 사람 간 봐? 맨날 무슨 생각을 하는지―.”

 따위의 말에 당장 스트라디바는 머릿속이 하얗게 탈색되었다. 누가? 뭐? 양다리? 단어의 뜻은 분명 알고 있었지만 그것이 한 문장으로 이어지지 않았다. 애초에 누가 있기나 하면. 지금 맞춰주고 있는 이 인간도 하도 쓸만한 사람이 없어서 심심한 차에 걸어본 것뿐이었는데.

 ‘네가 하는 짓이 다 그렇지.’

 그런데도 귓전에 울리는 목소리는 스트라디바가 식은땀을 흘리게 만들었다.

 

 

 몰아치는 폭풍을 어떻게든 뿌리친 스트라디바는 억울했다. 정말로 억울했다. 어느 정도로 억울한가 하면 당장에 집으로 뛰어 들어가 페일드라스의 치렁치렁한 머리털을 죄다 뜯어버리고 싶을 정도로. 대체 왜 거기서 그놈 생각이 튀어나오느냔 말이다. 심히 억울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난 억울해!”

 스트라디바는 누가 들으란 듯이 빽빽 고함을 질렀다. 누가 돌아보건 말건 신경도 쓰지 않았다. 억울해서 소리라도 지르지 않으면 분통이 터졌다. 대체 왜 내가. 미친 게 아니고서야 어떻게.

 ‘다른 사람이 마음에 있으면 이미 양다리인 거 아니야?’

 “미쳤냐!!”

 즉시 반발하는 소리가 튀어나온다 한들, 스트라디바가 아주 그 말에 찔끔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들은 말 중에 틀린 말은 없었다. 그가 손이 닿지 않는 곳에 있는 것이 닿지 않을 때 내려받기를 기대한 것은 사실이었다. 그 기대에 미치지 못했을 때 은연중에 실망해버린 것도 사실이었다. 그러나 나름대로는 티내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아마도. 확실히.

 그 외에도 분명. 그 때 그 때의 파트너들이 돈 계산에 인색하게 구는 모습을 볼 때나, 생각보다 질척거리며 들러붙을 때나, 하다못해 같이 밥을 먹으면서도 편식하는 모습을 보게 될 때도. 무언가 저울에 올라갈 일이 생기면 스트라디바는 서슴없이 그 비교값을 재어 그 결과를 확인했다. 저울 반대편에 올라가는 것은, 언제나 어김없이 빌어먹을 페일드라스 레겐베르크였고.

 “내가 진짜 돌았나!”

 또 다시 참지 못하고 스트라디바는 머리를 감싸쥐고 비명을 꽥 내질렀다. 미쳤다. 제정신이 아닌 건 20대 때 끝났다고 생각했는데 여전히 제정신이 아닌 모양이다. 당장 그 보랏빛 머리털을 다 죄 뜯어버리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힌 그는 뒤에서 툭툭 치는 손길에 퍼뜩 몸을 튕겼다. 어느덧 아파트 출입구 근처였다. 이 한밤중에 시끄럽다고 한 소리 들어도 할 말 없을 정도긴 하겠다. 깜짝 놀라 몸을 돌리면, 뒤에 있는 사람은 낯모르는 사람이 아니라 당장 쥐어 뜯어버리고 싶은 머리털을 달고 있는 낯익은 사람이었다.

 “밤중에 무슨 민폐냐.”

 “다 너 때문이잖아, 이 개자식아!”

 스트라디바가 또 한 번 꽥 소리를 질렀다. 아는 바 하나 없음에도 스트라디바가 뭘 하고 들어왔을지 익히 아는 페일드라스는 이 새끼가 또 시작이군, 하는 얼굴로 한심하게 쳐다보았다. 그 눈빛이 불쾌하기만 한 스트라디바는 다시 홱 몸을 바로 하고 성큼성큼 앞서 걸었다. 하여간 저 놈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제멋대로에, 말을 듣는 것도 하나 없고.

 그런 주제에 왜 자꾸 눈에 밟혀서는.

 “너 대체 언제까지 그렇게 살 거냐?”

 “…….”

 “네가 평생 그딴 식으로 놀고 먹을 수 있을 거 같아?”

 “네가 왜 신경 써?”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는 내내 나누는 대화 꼴이 이 따위였다. 페일드라스는 쳇바퀴 도는 대화가 이제 제법 신물이 났다. 그야말로 스스로 되물어봐야 할 문장이었다. 언제까지 이따위로 살 것인가. 정말로 언젠가는 나가라고 내쫓아버려야지. 그 또한 몇 번째 결심인지 떠올릴 수 없을 정도로.

 멋대로 주워와 멋대로 살렸으니 책임지라는 말을 들은 척하지 못할 것도 아니었으나.

 “나이는 어디로 처먹었냐. 적당히 놀 만큼 놀아서 인생 조졌으면 이제 제대로 사는 법이라도 궁리하든가.”

 그놈의 얼어죽을 양심이. 그것만 아니었어도. 페일드라스는 혼자 방에 쌩하니 들어가는 가느다란 등에 대고 부질없는 말을 던졌다. 귀담아 들을 거라 생각하지는 않았다. 쿵 하고 닫히는 문 소리가 그것을 증명해줄 듯 싶었다.

 “……지랄은.”

 스트라디바는 문에 기댄 채로 주르륵 미끄러져 주저앉았다. 제아무리 큰 소리가 나도 제 심장이 쿵쿵 뛰는 소리를 가려줄 것 같지 않았다. 그냥 못 본 척 지나가기나 하지, 그의 망할 동거인이자 물주는 뻑하면 남의 마음을 휘젓는 소리를 해댔다. 잔고 주제에. 잔반 처리기 주제에. 시중이나 들 것이지. 괜히 사람 마음만 심란하게.

 “뭐든 다 쉬워서 좋겠다. 나쁜 새끼.”

 뭘 하면 인생을 제대로 사는 건데. 스트라디바는 울컥 치미는 속에 손에 잡히는 대로 아무거나 바닥에 쾅 내던졌다. 죄없는 휴대전화가 허공을 가르며 힘없이 추락했다. 떨어진 충격으로 액정에 환하게 불이 켜졌다. 잠금화면에는 언제나 그가 지정한 배경사진과 함께 한 줄의 숫자가 나열되고는 했다. 눈 감고도 칠 수 있는 그 숫자들은 페일드라스의 연락처이기도 했다. 이제는 의미가 크게 없어진, 당장 지워도 상관없는 그것은 그럼에도 여전히 제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아직 기댈 수밖에 없어서.

 여전히 기댈 수밖에 없어서.

 “뭘 해야 하는지도 모르겠는데.”

 물어봐도 가르쳐주지 않을 거면서. 당연한 말을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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