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제의 바로 뒤에는 항상 답이 있다

 ‘사피’는 대체로 스스로에게 벌어지는 일에도 거의 무감각했다. 나일미르에 관한 것이 아니라면. 알아야 할 것이 있다면 그에 대한 것은 ‘사피라드 선생’쪽이 처리하게 두면 되었다. 낮에 알게 되는 것은 밤에도 자연스럽게 공유 받을 수 있었다. ‘사피’는 항상 세상과 한 발짝 거리를 두고 사는 방식이 좀 더 편했다.

 그가 존재할 수밖에 없도록 상황을 만들어낸 이부터가 그래먹었으니, 자연히 닮을 수밖에 없으리라고 여길 뿐이었다.

 그처럼, ‘사피라드 발루아’의 낮과 밤은 그 밖에도 판이하게 다른 지점이 종종 생겼다. ‘사피’는 ‘사피라드 선생’과의 괴리감을 적당히 무시할 수 있었다. 낮은 밤의 존재조차 모르니 그 역은 애초에 생길 수도 없었다. 모든 것이 평안하기 짝이 없었다.

 일반적으로 말하자면야, 그들이 겪는 일이 평범할 수는 없었다. 그들만큼이나 확고하게 자아가 자리 잡을 정도로 나이를 먹었다면 특히나. 보편적으로 여러 인격이 생겨 문제를 겪는 이들은 그보다 훨씬 더 어리고 연약한 시기에 시작된다고들 했다. 아마도 이 특이 케이스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을 것은 지금은 없어진 그 괴이한 유물. 나일미르가 항상 가지고 다녔던 그 종이 분명했다.

 멀쩡하던 시기의 ‘사피라드 발루아’는 나일미르를 만나고 나서 한동안 반으로 나뉘어 쪼개지는 일상을 보내야 했다. 낮에는 평범하게, 밤에는 종을 이용해 빠져 들어간 일종의 최면 상태로. 나일미르는 의식 없이 자기만 보게 만든 ‘사피라드 발루아’에게 특별히 더 공을 들였다.

 무의식이란 것이 다 무언지. ‘사피’는 스스로 존재한 이후로도 한 번도 자기가 온전하다 여긴 적이 없었다. 얄팍한 술수. 그보다 못한 미약한 저항력. ‘사피라드 발루아’는 자기에게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모르지 않았다. 모르기에 그는 몹시도 민감한 편이었다. 그러나 그것을 온전히 받아들이는 것 또한 두려워했기에 그는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척하는 ‘사피라드 발루아’만을 낮에 두고 남아있는 의식 조금과 그와 관련한 모든 기억을 더해 그 자신조차 알지 못하는 ‘사피라드 발루아’를 밤에 못박아버렸다. 한 사람의 자기를 향한 필사적인 배척은 침묵으로서 완벽해졌다.

 억압을 통해 생겨난 새 인격은 기존 인격을 무시하고 깔본다 했다. 결핍을 통해 생겨난 새 인격은 기존 인격을 숭배하다시피 한다 했다. 그리고 공포를 통해 생겨난 새 인격은……. ‘사피’는 깜깜해서 거의 구분되지 않는 창 밖 풍경을 바라보며 한숨을 지었다. 낮의 자신이 그리도 감상적이니 그로부터 파생된 저 또한 그럴 수밖에 없겠다 하더라도. 홀로 너무 많은 생각을 하기에는 밤이 몹시도 길었다.

적당한 무시와 타협. 거울 속의 자신을 대하는 것에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관계였다.

 덜커덕하고 아래층 현관문이 여닫히는 소리가 발아래서 들려왔다. 최근들어 낮에는 사용되지 않는 외진 방향의 문이었다. 나일미르의 개인실―실험실로 곧장 연결되는 그 문이. 그가 이 시간까지 뭘 하고 들어왔는지는 확연했다. 가까이 가지 않아도 벌써 코끝에 비릿한 냄새가 스치는 듯 했다. ‘사피’는 다시금 한숨을 내쉬었다.

확 내려가서, 따져버릴까. 그로서는 드물게 폭발적인 충동이 들었다. 저번 사건이 아직 마무리 되지 않았으니 나가지 말라고 한 게 겨우 어제였을 텐데. 굳이 오늘도. ‘사피’는 낮의 자신이 걱정스럽게 읽던 조간신문의 제목을 상세하게 떠올릴 수 있었다. 이번에도 운이 좋다면―나일미르는 그 점을 한 번도 의심하지 않았지만―사건의 수사 인원들은 이번에도 별 다른 소득 없이 시체의 일부분만 건져가게 될 것이다. 그것이 곧 사실이 되리라고 머리로는 이해했으나.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뭐가?”

 퍽 뻔뻔한 목소리가 혼잣말에 멋대로 꼬리를 붙이며 따라 들어와도 ‘사피’는 돌아보는 척도 하지 않았다. 나름의 불만 표시였다. 나일미르의 씻는 시간은 나날이 짧게 갱신되고 있었다. 그 대단하신 예술 정신을 발휘하며 작업할 때는 뭐가 튀어 묻든 개의치 않으면서 집에 돌아와서는 가장 먼저 하는 일이 전신 샤워였다. 그야 뭐, 그 잘난 장갑에 앞치마에 작업복이야 잘도 갖췄으니까. 심리적인 문제란 자기 위안이 차지하는 부분이 참 큰 모양이라고 ‘사피’는 자기 신발 앞코를 내려다보며 결론지었다. 나일미르의 결벽증에는 다소 선택적인 면도 있을지도. 지금은 그저 뭐든 트집을 잡으려는 것에 불과할 수도 있고.

 “대답 안 해줄 거야?”

 피 냄새는 조금도 묻히지 않은 그림자가 ‘사피’를 나른하게 덮어왔다. 나일미르는 귀가한 직후에는 ‘사피’라도 곁에 불러들이지 않았다. 그 부분에 관해서도 ‘사피’는 이미 예전에 나일미르에게는 자기 과시적인 부분이 있다고 결론지은 적이 있었다. 완벽한 뒤처리. 어설픔은 존재하지 않는 그의 위대한 예술 정신에 건배, 라고 할까. 여하간 나일미르가 준비가 될 때까지 아는 척하는 것은 허용되지 않았다. 아주 초기에, 그가 잠깐 동안 말을 할 수 없었던 처음부터 알아차린 금기였다.

 아직 어디까지가 선 안이고, 어디부터가 선 바깥인지 알 수 없던 때에 잠깐 저질렀던 실수가 어떻게 되돌아왔는지는 ‘사피’에게조차 남아있지 않은 기억이었다.

 “……말하면. 귀로 들어주긴 하게?”

 “오늘은 해야 할 분량이 있어서 어쩔 수 없이―.”

 “알고 싶지 않아.”

 ‘사피’는 저를 달래려는 듯한 나일미르의 말을 싹둑 잘라먹었다. 사피―, 하면서 부르는 목소리에도 반응하지 않았다. 이럴 때면 나일미르가 한참 어리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깨닫게 되었다. 어쩔 수 없이 오래 부대끼게 되면서, 차츰 ‘사피’는 더 이상 나일미르가 어렵거나 두렵지는 않게 되었다.

 낮의 그는 조금 달랐다. 그렇다고 무작정 두려워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보다는 뭐랄까, 밤에 다정하게 구는 것보다 세 걸음은 떨어진 거리감과 그 뒤에 숨겨진 서늘함의 간극을 이해하지 못해서 알 수 없는 불안감에 휩싸이는 것에 가까울 것이다. 몇 번이고 ‘사피’는 낮의 자신에게도 기회를 주라며 좀 더 가까워지도록 나일미르를 구슬려왔지만 여태껏 잘 먹히지는 않았다. 지금 이만큼 저에게 들이는 노력의 반의반이라도 한다면 ‘사피라드 선생’은 분명 감격에 겨워서 특제 스튜를 두 단지는 만들어서 품에 안겨줄 텐데.

 ―그 순간, 끊이질 않고 이어지는 ‘사피’의 생각을 끊고 나일미르가 속삭였다.

 “사피. 그래서 나 안 볼 거야?”

 다시금 매달리는 말. 나일미르 또한 꽤나 예민한 만큼 타인의 감정을 기민하게 파악했다. 대부분의 경우에 타인은 제 옆에 없는 듯 무시하곤 했지만. ‘사피’는 나일미르에게서 제가 예외적인 위치에 존재한다는 것쯤은 알았다. 더 이상은 눈앞에 없다고 무시할 수 없게 된, 그래서 신경 쓸 수밖에 없는. ‘사피라드 선생’의 말을 빌리자면 꽤나 아낌 받는 것일 테다. 그런 다정한 표현이 어울릴 사이인지는 둘째치더라도.

 “이미 보고 있으면서.”

 ‘사피’는 그들을 진하게 비춰내는 유리창을 턱짓으로 가리켰다. 거울에 비춰보는 정도는 아니더라도 꽤 선명하게 볼 수 있는 유리 위로는 아까부터 뚫어져라 쳐다보는 나일미르의 시선까지 여과 없이 보여주고 있었다. 그건 제대로 보는 게 아니잖아. 시선 하나 꼼짝하지 않고 볼멘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돌아보지 않을 수 없게 하는 자태였다. 결국 ‘사피’는 고개를 홱 들어 올려 나일미르를 올려다봤다. 살짝 음영이 드리운 분홍색 눈에는 불만이 가득했다.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치는 나일미르의 푸른 눈은 무심하기만 했다. 그 무심함이 못마땅한 ‘사피’는 딱딱하게 물었다.

 “언제쯤 되어야 내 말을 똑바로 들을 거야?”

 “글쎄.”

 대놓고 하는 거짓말보다는 훨씬 들어주기 좋은 소리였다.

 

 

 사피라드는 막 정오에 가까운 시간이 되어서야 부스스 일어나 걸어 나온 나일미르를 볼 수 있었다. 그의 하루 시작점은 보편적으로 한참 늦은 시간대에 있었다. 밤에만 해야 한다는 일이 늘 늦게 끝나는 탓에 그럴 수밖에 없다고 했다. 그래도 아침 식사는 같이 할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오늘도 일부러 남겨 둔 나일미르의 몫은 고스란히 돌아올 모양이었다. 나일미르는 하루에 두 끼만 먹어도 충분하다 여겼고, 사피라드는 언제나 셋이서 먹고도 남을 양을 만들어내는 재주가 있었다. 그래도 괜찮았다. 언제나 먹을 게 있고, 나누어 먹을 사람이 있기만 하다면 사피라드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욕실에서 물이 쏟아지는 소리가 들렸다. 사피라드는 느긋하게 읽던 신문의 마지막 페이지를 넘겼다. 찻잔에 남은 마지막 홍차 한 모금을 입에 머금었을 때, 사피라드는 수건을 머리에 얹은 채 걸어오는 나일미르의 늘씬한 모습을 눈에 담았다. 평소에는 좀 창백한 것에 가까운 안색은 따스한 물로 씻고 나온 직후에만 조금 발갛게 물들기도 했다. 꼭 지금처럼.

 “오늘도 뭔가 끔찍하고 어쩔 수 없는 사건사고 기사만 있나요?”

 나일미르가 대수롭지 않은 투로 물었다. 마치 내일 날씨 예보의 강수 확률이라도 물어보는 듯한, 따분하기 짝이 없는 어조로. 사피라드는 읽고 있던 신문으로 시선을 떨어뜨렸다. 유감스럽게도 지금 그들이 사는 곳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도시에는 연일 기이한 인명 사고가 벌어지고 있었다. 종족을 불문하고 매일 밤 누군가가 죽었다. 그럼에도 전체 시신은 발견되지 않고, 사건 현장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기괴하게 변형된 팔 한 짝이나 다리 한 짝만이 발견되는 식의 연쇄 살인 사건이었다. 사피라드는 뭐라 언급하는 대신 겨우 무시하고 있던 신문의 앞면을 다시 되돌려놓았다. 식탁에 올려놓는 것으로 그 전면은 나일미르의 눈에도 들어왔다. ‘시내 유력 인사들의 해괴한 죽음: 진전 없는 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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