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둥새] 네가 그러면 안 되지

 살다보면 이런 날 저런 날이 있다. 괜히 보이는 모든 게 짜증나고 원래 짜증나던 녀석이 숨만 쉬고 있는 것만 봐도 잔잔하게 열이 차오르는 그런 날. 아퀼라는 괜히 필라스의 방으로 건너와서는 필라스가 반쯤 멍한 얼굴로 멍청하게 앉아있는 것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그의 품에는 길다랗게 쪼갠 나무 위로 줄이 몇 가닥 칭칭 감겨 있는 악기가 있었다. 다른 때는 가끔 아퀼라도 혹할 정도로 아름다운 선율을 내보낼 줄도 아는 물건이었지만 지금은 도무지, 듣기 싫은 소리만 땅땅 내고 있었다. 그는 그것이 못내 거슬려서 현악기의 줄만 퉁퉁 튕겨대는 필라스의 손을 홱 후려쳤다. 아! 일없이 화풀이 대상이 된 필라스가 억울한 소리를 내는 것도 어쩌면 당연한 일이겠지만. 아퀼라는 나름대로 자기만의 이유가 있었다.

 “이 치사하고 얄미운 자식.”

 “아니 내가 뭘 했다고.”

 “네 존재 자체가 아주, 아주 나빠.”

 난데없이 근본부터 존재 부정을 당한 필라스는 적당한 대답을 찾지 못하고 눈만 깜박였다. 아퀼라가 괜히 심술을 부리는 것은 특이할 것도 없었지만 이 정도로 틱틱거리는 때는 많지 않았다. 뭘 잘못 먹기라도 한 듯이―물론 그들은 방금 전에 같은 식탁에 앉아 같이 조리한 음식을 나누어 먹었다―사납게 아르르거리고 있는 아퀼라는 필라스에게 참으로 난감한 과제였다. 달랜다고 하는 것이 들어 먹히지도 않을뿐더러 도리어 역효과가 날 수도 있었다. 그렇다고 마냥 내버려두면 그는 곧 몸에 성한 구석이라고는 남아나지 않게 될 것이다. 어쩐다. 아예 상대를 안하는 것이 가장 낫다는 것을 알면서도 필라스는 한숨을 내쉬고는 악기가 어디론가 던져져 부서지기 전에 바닥에 얌전히 내려놓았다.

 “나가.”

 “흥, 싫은데.”

 뛰는 놈 위에 나는 놈이 있고, 필라스가 아퀼라의 성질을 아는 것만큼 아퀼라 또한 필라스의 성향을 잘 알았다. 아퀼라는 필라스가 악기를 내려놓은 이유를 꿰뚫어보고, 그것을 아예 발로 뻥 차버렸다. 야!! 악기가 우당탕 구르며 현이 엉망진창으로 울려대는 소리를 내자 대번에 안 그래도 창백한 안색이 더더욱 하얗게 질린 필라스가 빽 소리를 질렀다.

 “저게 얼마인줄은 알아!?”

 “모르는데.”

 뻔뻔하기 짝이 없는 대답을 늘어놓고는 어깨를 으쓱하던 아퀼라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방에서, 집에서 쌩하니 뛰쳐나갔다. 재해가 몰아친 현장을 보는 듯한 표정을 짓고 닫힌 문 뒤에서 한참을 서있던 필라스는 별 수 없이 의자 위에 털썩 앉았다. 저 망할 녀석이 이번엔 대체 뭐가 문제인가. 짐작 가는 바는 하나도 없었으나 그는 하나 정도는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마도, 분명, 자기가 아닌 다른 ‘자신’이 대신 그 대답을 들을 기회 한 번 정도는 얻을 거라는 걸. 신체 변화 주기가 뚜렷하게 일정한 것은 아니었지만 보통 오늘처럼 아무 생각도 떠오르지 않고 내내 멍하게 있는 날은 그럴 확률이 높았다. 그리고 아퀼라 그린우드는, 그 모습의 제게 조금은 누그러지곤 했다.

 “용케 멀쩡하네.”

 필라스는 바닥을 험하게 구르다 내동댕이쳐진 처량한 악기를 다시 주워들었다. 다행이라면 다행스럽게도 악기는 어디 깨진 구석 없이 멀쩡해보였다. 그것을 품에 안고 가만가만 조율하듯 현을 튕기던 그는 한걸음 한걸음 걸어 침대 위에 털썩 앉았다. 이따금 불규칙하게 튀어오르는 음 외에는 모든 것이 고요했다. 마치 처음부터 그 혼자였던 순간들처럼. 순간 필라스의 속에서도 미미하게 울렁이는 감정들이 있었다. 짜증, 불안, 심란함. 일평생을 함께 해온 그의 일부나 다름없는 현상이어도 새삼스럽게 그는 어쩐지 진동하는 마음을 가라앉힐 길이 없었다. 아무리 성질이 더러워도 아까처럼 짜증이라도 부려줄 그의 동거인이 다시 돌아오면 좋겠다고, 10초 안에 후회할 생각까지 할 만큼.

 필라스 레이븐크로프트는 이제서야 스스로가 고독과 얼마나 멀리 있었는지 실감했다. 그는 그것과 한 번도 가까운 적이 없었다. 다만 그럴 수 있는 척 했을 뿐.

 

 

 해가 쨍쨍할 때 뛰쳐나갔던 아퀼라가 다시 집에 돌아온 때는 어스름이 슬금슬금 하늘을 먹어 치울 때였다. 배고프다는 이유를 핑계로 끌어당겨서 주방에 몰래 숨어들어가듯 계단을 조심조심 밟아 오르던 그는 이내 계단을 힘차게 밟았다. 내 집인데 왜 내가 눈치를 봐! 일부러 꿋꿋하게 한 걸음 한 걸음 내딛으면서도, 그는 괜히 건너편 방이 신경 쓰였다. 주방 테이블 한편에는 이미 한 차례 조리가 끝난 음식이 담긴 접시가 식은 채 놓여있었다. 아퀼라는 그것이 자기 몫의 식사인 것을 단번에 알아보았다. 식은 것을 투덜거릴 틈도 없이 단숨에 씹어 삼킨 그는 먹고 남은 식기를 대충 내버려 두고 건너편 침실로 넘어갈 수 있는 복도로 향했다.

 아퀼라가 벌컥 문을 열었을 때, 낮에 그가 뛰쳐나가기 전과 마찬가지로 방의 주인은 이번에는 책장에 기댄 채 책을 넘겨보고 있었다. 그가 이쪽을 향해 시선조차 돌리지 않았지만 아퀼라는 문이 열리고 닫히는 소리에 맞춰 다음 페이지를 넘기려는 손이 움찔움찔 종이를 튕기는 것을 보았다고 확신했다.

 “왜 거기 버티고 서있어?”

들어올 거면 들어오고 나갈 거면 나가. 평소처럼 시큰둥한 말투였지만 목소리는 낮에 들은 것과 확연히 달랐다. 보다 확연히 또렷하고 조금 높아진 목소리나 좀 더 굴곡이 뚜렷해진 모습으로나 어느 모로 보나 더 확인할 필요도 없었지만 아퀼라는 부러 큰 목소리로 물었다.

 “너 누구야.”

 “저게 지금 서서 꿈을 꾸나.”

 “아니거든!”

 아퀼라는 씩씩거리면서도 선뜻 한 걸음을 더 내딛지도 않았다. 책 그림자 너머로 그 모습을 흘끗 본 이는 한숨을 내뱉었다. 어느 쪽이든 별 차이가 없다고 하는데도. 그의 입장에서 굳이 따지자면 마력을 다루는 것이 더 편한가 또는 근력을 다루는 것이 더 편한가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아퀼라는 이따금 그 이상으로 그를 전혀 다른 사람을 보듯 굴고는 했다. 정확하게는, 한창 낯가림하면서 멀찍이 있던 강아지가 가면 하나 썼다고 다른 사람을 본 듯 달려와서 치대는 것 같다고 할까. 사유야 어찌되었든 이대로는 끝이 안 나겠다 싶어서 그, 필리아 레이븐크로프트는 책을 탁 덮었다.

 “보면 알잖아. 바뀐 지 한참 됐어.”

 그 대답에 겨우 아퀼라는 슬그머니 걸음을 옮기더니 그대로 침대에 털썩 올라 누웠다. 그러더니 마치 제 침대인 양 옆 자리를 퉁퉁 두들기면서 따라 들어올 것을 필리아에게 종용하는 것이 아닌가. 안 들으면 들을 때까지 저러고 있을 알기에 필리아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마음대로 해라, 아주. 털썩 침대에 앉자마자 허벅지에 노란 머리가 다가와 찰딱 붙었다. 이 웬수같은 것. 필리아는 괜시리 콩 쥐어박고 싶은 머리통을 빤히 쳐다보다가 다른 쪽 무릎에 턱을 괴었다.

 “해서, 바람 좀 쐬니까 이제 기분 풀렸냐?”

 “어. 근데 저녁이 맛없어서 다시 나빠질 거야.”

 “이게 또 억지를 쓰네. 사고 칠거면 도로 나가.”

 “안 들려.”

 아퀼라는 필리아의 허벅지를 베고 데굴데굴 구르다 곧 그의 앞으로 쏠려 흘러내린 하얀 머리칼을 이래저래 잡고 손장난을 쳤다. 간지럽다. 필리아는 불퉁하게 한 마디를 툭 내뱉기는 했으나 그렇다고 그를 밀어내지는 않았다. 잠자코 하고 싶은 대로 내버려두니 아퀼라는 필리아의 머리를 땋으려는 것처럼 세 가닥으로 나눈 머리카락과 사투를 벌이기 시작했다. 사냥감은 잘만 해체하는 손재주를 가진 그 손으로도 어떤 것은 도통 생각대로 안 되는지 그는 몇 번인가 헛손질을 반복했다. 두어 마디 땋아 내릴 즈음에는 그만 손등으로 필리아의 가슴을 푹 누르기도 했다. 푹신한 감촉은 여느 때와 별 다를 것도 없건만, 아퀼라는 뾰족한 감상을 내뱉고 말았다.

 “넌 이거 무겁지도 않냐?”

 “이게 뭐야?”

 “이, 이 물컹하고 쓸데도 없는 거!”

 말을 하다 보니 또 성질이 나서 급발진을 밟아버렸다. 아퀼라는 굳이 말을 하게 만드는 필리아가 괘씸해 잡고 있던 머리카락을 죽죽 잡아당겼다가 석류빛 눈과 마주치는 순간 그만 두었다. 필리아는 딱히 뭐라고 하려던 건 아니었다. 그는 아퀼라의 감람빛 눈을 바라보았다가, 눈 위를 살짝 덮을 정도로만 아무렇게나 잘린 노란 머리카락을 살폈다가, 슬금슬금 시선을 내려가며 전체적인 상을 가볍게 훑어보고는 대수롭지 않게 입을 열었다.

 “너도 있잖아.”

 “난 너처럼 그렇게 무식하게 안 커!”

 “크든 작든 뭐, 있을 곳에 있는 것을.”

내 몸인데 뭐 어쩌나. 그냥 감당해야 하는 거. 필리아는 딱히 고민할 일 없었던 질문을 앞에 두고 대강 생각나는 대로 대답했다. 그와 동시에 아퀼라가 무엇에 갑작스레 그리 골을 내고 다녔는지, 그가 이따금 스스로의 어떤 점에 짜증을 내는지에 대해 생각이 미친 순간. 아퀼라가 빽 소리를 질렀다.

 “네가 그렇게 말하면 안 되지!”

 “악!! 야, 머리카락! 아!! 아파! 야! 미안해, 미안하다고!”

 “나쁜 새끼야!”

 아퀼라는 아예 필리아의 위를 덮쳐서는 우악스럽게 목덜미의 옷깃을 잡아당기면서 덤벼들었다. 사정없이 쥐어뜯기고 손바닥으로 맞아가면서 필리아가 할 수 있는 거라고는 아무 말이나 끄집어내는 것뿐이다. 그래 그건 내가 잘못했다. 잘못했는데, 아프다고 이 자식아! 고얀 성질머리를 다 받아주기에는 아퀼라의 손아귀 힘이 몹시도 억셌다. 필리아는 참다 못해 아퀼라의 손목을 잡아챘다. 아주 떼어놓기에는 그 손이 붙잡고 있는 머리카락이 꽤 많았다. 손가락을 하나하나 풀려고 애쓰면서, 필리아도 어느새 짐짓 성난 목소리로 쏘아붙이기 시작했다.

 “미안하다고!”

 “그게 사과하는 거냐!?”

 “뭘 더하라는 거야!”

 필리아는 뜯겨지기 직전의 머리카락을 아퀼라의 손에서 죄 빼냈다. 여전히 분이 덜 풀린 아퀼라는 어깨까지 들썩이며 성난 숨을 씩씩 내뱉었다. 오늘따라 왜 이럴까. 이제는 필리아도 적잖이 귀찮아져서 성가신 걸 보는 눈으로 아퀼라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다행이라면 다행스럽게도, 아퀼라는 이 이상으로 행패를 부리지는 않았다. 다만 잊을만하면 그렇듯이 필리아를 베고 누웠을 뿐이다.

 “네 머리 무겁다고 했다.”

 “어쩌라고.”

 필리아가 뭐라고 하건 아퀼라는 보란듯이 필리아에게 착 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아퀼라가 편한 자세를 찾는 듯이 고개를 이리저리 움직이다 보면 필리아는 자연히 아퀼라의 뿔에 푹푹 찔렸다. 특히나 존재감이 남달라지는 가슴 부위는 말할 것도 없이. 그러다 뿔 끝이 명치 근처를 누를라 할 때 필리아는 그냥 가슴에 아퀼라의 머리를 파묻어버렸다. 졸지에 심사를 뒤틀리게 하는 물컹한 가슴에 얼굴을 푹 박게 된 아퀼라는 물 밖에 튀어오른 생선처럼 몸을 퍼득거리고 말았다.

 “숨 막혀! 야!”

 “가만히, 있어라. 좀.”

 위에서 짓누르는 손길을 피하려고, 아퀼라가 몇 번인가 더 퍼덕거리다 그만 포기하고 잠잠해질 때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필리아는 턱 밑에서 들리는 씩씩거리는 숨소리가 여전히 짜증이 나서인지 그렇지 않으면 단지 날뛰다 지친 여파인지 굳이 알고 싶지 않았다. 보아하니 제게서 도통 떨어지지 않을 아퀼라가 성난 소처럼 들이받지만 않아도 충분했다. 몇 번인가 작게 투덜거리던 아퀼라는 필리아가 손을 거둬가도 잠자코 있었다. 솟구치던 짜증이 소강상태가 되자 덩달아 지친 것이 분명했다. 필리아도 뒤늦게 문득 허기를 느꼈다. 단순히 기운이 빠진 것일 수도 있었지만.

 “남은 거 뭐 있던가. 너 때문에 더 기운 빠져서 배고파.”

 “고기 구워. 야채 빼고.”

 “이건 맨날 고기 타령이야.”

 “야채 올리기만 해. 그리고 가만 있어. 지금은 이러고 있을 거니까.”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말이었다. 아퀼라는 때때로 그를 베개의 대용으로 여기는 것 같았으니. 괜한 말다툼을 벌이기에는 필리아 또한 지금은 피곤했다. 아무렴. 필리아는 빙글 몸을 돌렸다. 그리고는 제 위에 있던 아퀼라를 그대로 인형 안듯 끌어안았다. 품 안에서 즉시 불만이 터져나왔다.

 “놔!”

 “위에 있으나 옆에 있으나 똑같은 거 아니냐.”

 “똑같긴! 이 물컹거리는 게 누르잖아!”

 “어어 그러냐.”

 언제나처럼, 필리아는 아퀼라의 말을 귓등으로 들었다. 다리 아래로 잔뜩 골이 난 발이 퍽퍽 무릎께를 차는 것이 느껴져도 내버려두었다. 어차피 책도 못 읽게 방해할 거, 지루함을 해결할 수 없다면 심란하게 비어 있는 부분이라도 채우는 것이 나았다. 어딘가 꼬인 속내가 조금쯤은 풀어질 만한 즈음에. 퍽, 하고 삐죽한 뿔이 또 다시 가슴팍을 파고들었다. 넌 내가 곰인형으로 보이냐? 이윽고 또 한 번 걷어차는 발길질에 한숨 한 번. 곰인형은 귀엽기라도 하지. 그리고 거듭 한숨을 한 번 더. 너도 귀엽게 반으로 접어버린다!

 

 

 

pms란 누구에게나 아주아주 성가시겠다…는 생각에 써본 글.

아킨은 플린이 자의가 아니더라도 두 성별을 오갈 수 있다는 것을 치사하고 얄밉게 보고 있다고 합니다.
스스로 인정하지 않지만 약간은 부럽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고 함.

플린은 둘 다 나인데 구분하는 게 무슨 상관인가…라고 끝내 이해를 못한다.

이러나저러나 플린 생일 기념글이 됨 (?

 

답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