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둥새] 이 망할 꼬맹이

 

이 시리즈에는 다른 설정이 부여됩니다. 대략적으로 말하자면 마비노기 AU에서 약간 변형을 거쳤습니다.

여기서 플린은 지상 생명과 계통이 다른 악마종으로 몽마입니다. 지상 생명체가 악몽을 꾸도록 유도하여 그 안에서 부정적인 감정을 주식 삼아 먹을 (주로 동족이 하는 방식) 수도 있지만 일부러 다른 길을 택했습니다. 뒷골목에 넘치는 버려진 아이들을 모아 그들의 슬픔과 걱정을 주기적으로 공급받는 방식을. 보육원을 세우고 나서는 동족으로부터 보모라 놀림을 자주 듣습니다. 플린은 그 때마다 화를 내지만.

타인의 꿈에 침입했을 때 플린은 상대가 이상적이라 여기는 상태를 취하게 됩니다. 이상형이 남성이라면 남성, 여성이라면 여성의 모습을, 특정하게 원하는 바가 없거나 구별짓지 않는 때는 양쪽을 적당히 섞은 모습이 됩니다. 플린이 스스로 내리는 정체성은 남성에 가깝다 여기나 어떤 것이든 개의치 않습니다.

대충 뭐 이런 모습….

그림은 전에 둣둣님이 그려주신 뿔달린 플린.

아킨은 그런 플린이 세운 보육원에 들어온 엘프 꼬맹이입니다. (아마도 조금 먼 미래에) 모친이 다시 데려갈 예정.

 

 몽마들의 주식이 악몽이라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나 배부르게 포식할 수 있는 것은 또 다른 문제였다. 훌륭한 악몽이란 공포에서 기인하고 공포란 알지 못한다는 무지함에서 나오는 법. 어떤 악질적인 몽마들은 부러 사람들의 마을 전체를 자기 입맛에 맞춰 만들어놓고 낮에는 괴롭히며 밤에는 꿈을 착취하는 방법을 쓰기도 하였다. 그것을 가만 내버려두면 사람들은 그것을 입에서 입으로 퍼뜨렸고 어떤 이들의 고통은 다른 곳에서 소설이 되어 팔려나갔다. 그걸 읽은 몇몇 이들은 또 다시 색다른 악몽을 자아내고. 희한한 연쇄의 흐름이었다. 여하간 조금만 품을 들이면 다수가 즐길 수 있기에 그런 ‘호러 스팟’ 들은 몽마들에게도 상당한 인기를 끌었다. 그것을 거래의 대상으로 쓰는 자들도 있었다.

 그런 유행이 도는 와중에 필라스는 상당히 신물을 내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런 자리에서 나올 악몽이란 결국 차려진 것은 많아도 실속 하나 없는 불량 식품이나 다름없었다. 억지로 쥐어짜내는 것이 퍽이나 영양가 있겠다. 영양가 운운하지 않더라도 그는 그 억지로 부풀려내는 짓거리들이 지긋지긋했다. 아무래도 너무 오래 살긴 한 모양이다.

 그렇게나 하나하나 까탈스러운 그가 새로 시작한 일은 어울리지도 않게 보육원 건립이었다. 어떤 시절이든 낳는 이조차 원치 않는 아이는 불쑥불쑥 태어났다. 최근 들어 그런 아이들에게는 대개 ‘몽마로 인해 태어난’ 아이라는 썩 옳지 않은 꼬리표가 붙었다. 세상에 밝힐 수 없는 피해를 받은 여자들은 으레 그러한 거짓으로 스스로를 구제하곤 했다. 사실을 쓰자면 세상에는 다종다양한 종족이 번영하고 있었지만 악마종은 그들과 아예 생물 분류가 달랐다. 혼혈이 아주 불가능한 것은 아니었으나 과정이 일반적이진 않았다. 그러나 그 사실을 아는 이는 드물었고 적당한 눈가림으로 그들은 아이들을 잠깐이라도 포기하는 것으로 사회에서 사면되었다. 끝끝내 모친이 찾지 않고 남겨지는 아이들은 사회의 일원으로 인정 받는 일도 극히 드물었고, 대부분은 사회에 편입될 나이가 되기 전에 뒷골목을 해메거나 그보다 더 어릴 때 죽기도 했다. 

 종족조차 다른 사이에 필라스가 사회에서 끊어진 채 태어나 죽는 어린 것들에게 연민을 느낄 이유는 없었다. 어느 시대든 덧없는 죽음이란 차고도 넘치는 법. 하나하나에 의미를 부여하다가는 죽어서 괜찮은 것이 어디 있겠냐고 세상을 떠받치려는 미친 놈 되기 딱 좋았다. 그랬던 그가 그리 좋은 사이도 아닌 교회에 사람인 척 행세하며 보육원 건립 허가를 받은 까닭은 밤중에 들은 어린 것들의 비명이 어지간해진 탓이었다. 

 시대의 흐름을 타고 사회가 빠르게 발전해가는 사이에도 그 부는 어둡고 축축한 밤의 뒷골목까지 돌지 않았다. 날이 갈수록 부모를 잃은 아이는 늘어만 가는데 그들의 처지는 나아지지 않았다. 좌절과 절망은 악몽이 되어 밤하늘을 뒤덮었다. 이대로 악몽의 밀도가 높아지면 이곳에도 그놈의 심란한 ‘유행’ 이 자리 잡을 가능성이 컸다. 어떻게 자리 잡은 적당히 고요하고 적당히 음습한 곳인데, 필라스는 새로 거처를 알아보고 싶지 않았다. 이렇게 된 이상 알아서 자체 관리를 하면서 여물지 않은 악몽을 적당히 수거하며 편안하게 사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하여간, 필라스 또한 사서 고생도 해본다는 젊은 날은 이제 다 지나간 셈이었다. 편안하고 안락한 삶은 어느 종족이든 바라마지 않는 궁극적인 지향점일 것이다.

 ―헌데, 이건 또 뭐지?

 “짜증나! 저리 가라고 그래!”

 “…….”

 보육원을 건립해놓고, 필라스는 보통의 사람으로 위장해 본인이 세운 보육원에 계약직 직원으로 근무하는 식으로 조작해 넣어두었다. 눈에 띌 정도로 새하얀 머리카락도 새까맣게 물들여, 필라스 레이븐크로프트라는 이름을 달고. 낮의 그가 하는 일은 대강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었다. 새로 들어온 아이들의 서류 정리, 나잇대별로 맞게 반에 분류해서 담당 교사에게 인솔하는 것과, 낮잠을 자야 하는 아이들의 안전 관리에, 온갖 빨래들을 정리하는 등의 시시콜콜한 잡무들. 스스로 앞가림을 할 수 없는 어린 것들은 처음 예상한 것보다도 손이 많이 갔다. 게다가 성질머리는 어떻고. 악마종보다 더 악마같은 어린 것들에게 시달리면서 필라스는 몰라도 됐을 법한 인생의 쓴맛을 종류별로 가지가지 맛보고는 했다. 그리고 이번에는 시작부터 제대로 난관에 부딪쳤다. 

 어린 아이들이란 보통 상대의 얼굴이 보기 그럴듯하면 잘 따라주는 경향이 있었다. 그런 점에서 필라스는 제법 객관적으로도, 무난하게 아이들과의 첫 대면 테스트를 쉬이 통과할 수준의 외모를 갖추고 있다고 자부하고 있었다. 그 자부심이 무색하게도 이번의―아퀼라 그린우드라 하는 이름표와 같이 들어온 아이는 조금도 쉽지 않았다. 아니, 그의 석류색 눈과 마주하자마자 발작하듯 우짖는 꼬맹이는 역대 처음이었다.

 “차였네.”

 “차이셨네.”

 “플린 선생님이 차일 때가 있네.”

 “다 들립니다만은.”

 대기실에서 같이 휴식 중이던 다른 직원들이 히죽히죽 웃는 소리를 뒤로 하고 필라스는 어깨를 파르르 떨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방 안에 익룡 하나는 소환한 듯한 아퀼라는 필라스와 다시 눈을 마주하자 또 와악 소리를 질러댔다.

 “나가!!”

 극명한 아이의 거절에 필라스는 골이 지끈거렸다. 이따금 종족을 불문하고 어린 것들은 때때로 자기와 다른 것을 예민하게 감지하는 본능을 타고나기도 했다. 타고난 재능은 자라면서 없어지는 것이 보통이었으나 극히 소수의 몇몇은 그렇지만도 않았다. 이번의 꼬맹이도 그런 케이스인지는 불명확하지만……필라스는 어느새 그의 발을 힘차게 걷어차고 있는 아퀼라의 샛노란 뒷통수를 내려다보았다. 모르긴 몰라도 성질머리 하나는 고약해보인다. 제아무리 고약한 성질머리여도 그의 긴긴 경험에 미루어 보통은 제대로 된 교육을 받으면 나아지기는 했으나 이녀석은 어떻게 될 지 전혀 감이 오지 않았다.

 퍽퍽퍽 가열차게 후려차는 조그만 발길질이 끊이질 않았다. 대충 차는 것도 아니고 제법 발에 힘을 실을 줄도 아는 것이 아퀼라는 꿈쩍도 하지 않는 필라스가 어지간히 분한 듯했다. 발등을 콱콱 밟고 차던 아퀼라가 기어이 필라스의 발목을 있는 힘껏 차버렸다. 정확하게 관절부위를 얻어맞은 필라스는 끝내 잇새로 새어나오는 신음소리를 누르지 못했다. 질끈 감았던 눈을 떴을 때 그는 잔뜩 의기양양해져서는 빤히 올려다보는 아퀼라와 눈이 마주쳤다. 새파란 감람색 눈이 말하고 있었다. 당장 꺼져!

 이놈의 성질머리……언젠간 뜯어고쳐 줄테다. 기세등등한 아퀼라와 어린애에게 도발당해 넘어간 필라스 사이에 유치한 눈싸움이 한참이나 이어졌다.

 

 

 썩 좋지만은 않았던 첫 만남은 별개로, 필라스는 아퀼라가 여간내기가 아님을 금방 알아보았다.

 여러 시대를 거치며 다양한 종족이 각자의 위치에서 천부인권을 확립하는 역사를 완성했다. 그 중 길고 뾰족한 귀가 특징적인 엘프들은 여타 종족보다 더 빠르게 자리를 잡았다. 그러나 단순히 다를 뿐인 것을 찍어 눌러야 하는 결점으로 만드려는 시도는 항상 있어왔다. 대등하게 관계를 유지한 기간은 그렇지 않은 때의 몇 배는 짧았으며 지금은 귀가 길지 않은 쪽이 조금 더 우세한 상황이었다.

 어린 것들은 그런 사회적인 위계 질서에 특히나 민감했다. 눈치로 보고 배우는 게 빠른 탓인지도 몰랐다. 그럼에도 확연히 뾰족한 귀에 짧지만 존재감이 뚜렷한 뿔까지 타고난 아퀼라는 조금도 거리낌없이 당당했다. 제 출신을 걸고 넘어지는 것들은 저보다 몸집이 훨씬 큰 상대여도 덤벼들어 때려눕혔다. 필라스에게 거침없이 발길질을 하던 기세 그대로 아주 활개를 치고 다녔다. 그간 잘 먹지 못하고 환경이 좋지 못했던 까닭에 왜소하다고 얕보이는 것도 잠시였다. 아퀼라는 제게 함부로 손대는 것들을 후드려 패는 등 강렬하게 인상을 새겼다. 이따금 싸움이 벌어지는 소리가 들려도, 어린아이들 사이에서 서열놀이 또한 중요한 것을 아는 어른들은 과열되지 않는 선에서는 관여하지 않았다. 아퀼라 그린우드가 그들 사이에서 실세가 되는 것은 과연 2주도 걸리지 않았다.

 “야.”

 조금 곤란한 점은, 자기들끼리 정해진 위치가 어른들 사이에서도 먹힐 거라고 생각하는 어리숙한 면이라고 할까. 큰 아이들은 소풍을, 작은 아이들은 낮잠을 자는 조용한 시간에 필라스는 홀로 묵묵히 비품실의 재고를 세어보다 문득 허벅지를 쿡쿡 찌르는 손길을 느꼈다. 한동안 본체만체하던 사이에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아퀼라는 근래 들어 필라스의 주위를 맴돌고 다녔다. 그거 뭐야? 뭐하는 거야? 뭐에 쓰는 건데? 종알종알 묻는 말도 많았다. 이런저런 서류를 정리하면서, 아니면 자재 비품의 재고를 세는 중에, 또는 실컷 모인 빨래를 두들길 때에도. 아퀼라는 어김없이 잡히는대로 필라스의 옷깃을 죽죽 잡아당기며 야, 야아, 하고 말을 걸었다. 필라스는 또 너냐, 하는 시선을 잠깐 내려보냈다가 시큰둥하게 대답을 늘어놓고는 했다.

 헌데 지금은 조금 곤란했다. 하필 지금 필라스가 검수하고 있는 품목은 언제나 아이들이 노리는 달달한 간식들이었다.

 “……안 자냐?”

 “너 뭐하는건지 들으면 잘래.”

 “들어서 뭐하게.”

 “말 돌리지 마! 빨랑 말해! 안 말하면 계속 쿡쿡 찌를테다! 듣고 자러 가게 빨리!”

 억지도 이런 억지가 없었다. 게다가 아퀼라는 눈치도 빠르고 뭣보다 필라스가 무엇을 가장 싫어하는지 기가 막히게 알아채고 있었다. 필라스는 질린 얼굴을 하고 다리에 무겁게 매달리는 무게를 느끼고만 있었다. 그가 영 말해줄 기미가 없다는 걸 깨달았는지 아퀼라가 그의 옷자락을 붙들고 등반을 감행하기 시작했다. 아무리 작고 어린 것이라도 무거운 건 무겁다. 필라스는 우선 재빠르게 상자를 닫았다.

 “옷 늘어나! 적당히 좀 해라! 너 저번에도 물어봤잖아! 내가 뭐한다고 했어!”

 “어, 어? 저번에는……책 정리했다고 했어.”

 어린애는 어린애여서 아직은 조금 목소리를 높이는 것만으로도 어느 정도는 아이가 막나가는 걸 막을 수 있었다. 잠깐 지난 일을 떠올리느라 상자에 대한 호기심도 잊고 잠잠해진 아퀼라를 대롱대롱 매달고 어기적어기적 비품실을 빠져나온 필라스는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닌 게 아니라 이 작업은 아이들이 대부분 자는 낮잠 시간에만 잠깐 가능할 정도로 까다로웠다. 그렇게 만전을 기해도 어떤 영악한 녀석들은 순번을 정해서 망보는 역할과 행동대장 역할을 나눠 가지고 자기들 입맛에 맞는 간식들을 몰래몰래 빼돌리기도 했다. 걸리면 그렇게 혼쭐을 내어도 어린 것들은 어른의 머리 위에서 춤을 추고, 여하간 도루묵이었다. 다리에 바짝 매달린 이 끈질긴 녀석도 앞으로 어떻게 될 지 뻔히 보였으나. 아직은 괜찮겠지. 필라스는 진이 빠진 얼굴을 하고서는 문을 닫았다.

 “문 왜 잠가?”

 “안 잠그면 잃어버릴 수도 있잖아.”

 “중요한 게, 많아?”

 드디어 필라스의 다리에서 떨어져나간 아퀼라가 느닷없이 하품을 했다. 졸음이 가득한 감람색 눈은 그러면서도 여전히 호기심으로 반짝였다. 아무래도 걸어서 가긴 그른 모양이다. 그러게 잠이나 자지 왜 여기까지 와서는. 필라스는 조그만 골칫덩이를 한품에 들어 안았다. 얼마나 잘 먹고 잘 크는지 조금만 더 지나면 이제 아퀼라는 그가 들어 올릴 수 없는 무게가 될 것이라는 예감이 불쑥 들 지경이다.

 그건 아랑곳않고, 자기 허락도 구하지 않고 안아든 것이 불만인지 아퀼라는 필라스의 품에서 버둥거리며 여기저기 주먹을 내질렀다. 아파. 때린 데 또 때리지 마라, 이녀석이. 필라스가 쉭쉭 겁주듯이 조곤조곤 말하면 아퀼라도 그에 응하는 것처럼 잠꼬대하는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계단을 오르고 복도를 걷다보면 품에 안긴 아이는 반항하던 것도 어느새 사라지고 고른 숨소리와 함께 온전히 품에 기댔다. 필라스는 턱 밑에 닿는 어린 아이의 머리에서 피어오르는 뜨끈한 온기를 느꼈다. 이맘때의 아이들이란. 우유내만 덜 난다 뿐이지 길거리의 강아지나 다름없었다. 이 덜 여문 조그만 머리속에 대체 얼마나 많은 말이 들어있는지. 특이할 것도 없지만 필라스는 새삼 신기하기도 하고, 기이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그에게 유년기란 시절은 거의 없는 것이나 다름없었던 탓인지도 모른다.

 낮잠용 공용 침실은 역시 한 자리가 비어 있었다. 다른 아이들을 깨우지 않게 조심스레 아퀼라를 뉘어 놓은 필라스는 휘휘 방 안을 둘러보았다. 겉보기에도 고요한 만큼이나 개개의 ‘내면’ 또한 퍽 평온하였다. 결과적으로 따져서, 필라스의 총체적인 계획은 반만 맞았다고 할 수 있었다. 굶주리지 않고, 추위와 더위에 내몰리지 않고, 안정된 상태를 유지할 수 있다는 두터운 신뢰 위로 불안이나 공포는 좀처럼 자라나지 않았다. 몽마로서의 그의 입장에서 말하자면 먹을 게 그리 많지 않은 실패한 사육장이라 할 만했다. 아쉬운 대로 필라스는 ‘돌아오지 않는 부모에 대한 그리움’ 같은 것으로 겨우겨우 허기는 면할 수 있었다.

 여기 사는 아이들은 자는 시간동안만큼은 한 번도 깨지 않고 조용해서 쉴 수 있다고 했던가. 필라스는 픽 헛웃음을 지었다. 그야 아무렴 그렇겠지.

 언제나 그랬듯, 앞으로도 별 다를 것 없을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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