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둥새] 2024 신년 기념

매서운 칼바람이 불던 추위도 잠깐 한풀 꺾여 어느 정도는 따뜻하다 할 수 있는 날씨가 되었다. 필라스는 어느덧 마지막 한 장 남은 달력이 마지막 하루를 가리키는 것을 확인한 참이었다. 언제 이렇게 되었지? 해가 갈수록 시간의 흐름은 기묘하리만치 빨라지는 것 같았다. 라르고Largo에서 알레그로Allegro, 아첼레란도Accelerando와 스트린젠도Stringendo를 지나 프레스티시모Prestissimo. 떠오르는 음율을 제멋대로 흥얼거리며 벽에 멀쩡히 걸린 달력을 휙 뜯어낸 그는 여태 새로 걸 달력조차 찾지 못한 참이었다. 뭐, 하루 이틀 달력 못 본다고 큰일 나는 건 아니니까.

필라스가 초라하게 한 장 남은 달력을 단숨에 종이 쓰레기로 만들어 쓰레기통에 처박은 순간에 덜컹 문이 열렸다.

“** 야 밖에 눈 와!”

“그래서 그 꼴이냐?”

펄펄 내리는 눈을 처음 본 강아지마냥, 노란 머리칼이 하얗게 보일 정도로 눈발을 고스란히 맞아 얼어붙은 아퀼라가 뛰어 들어왔다. 빨개진 코를 연신 훌쩍이면서도 그는 내내 싱글벙글 웃고 있었다. 그렇게 좋은가. 필라스에게 눈이란 내릴 땐 시야에 방해되고 그쳤을 땐 그대로 얼어붙어 성가시게 길을 망치는 번거로운 기상현상에 불과했다. 그러니 잔뜩 눈을 맞고 들어와서는 물에 젖은 강아지가 푸다닥 물을 흩뿌리는 것처럼, 아퀼라가 사방에 결정 모양으로 얼어붙은 눈조각을 뿌리는 것이 조금 달갑지는 않았다. 바닥에 깔린 러그가 더 습습해지기 전에 필라스는 두껍고 큼지막한 수건을 아퀼라에게 던졌다. 보지도 않고 기척만으로 날아온 수건을 붙잡은 아퀼라는 젖은 로브를 후드득 벗고 그 위에 마른 수건을 둘렀다. 물을 먹어 무거워진 세탁물을 수거하는 쪽은 이번에도 눈살을 잔뜩 찌푸린 필라스였다.

세탁물을 모아두는 통에 던지러 가는 필라스의 등에 대뜸 껄렁하게 식당에서 주문하는 듯한 목소리가 꽂혔다.

“야! 나 ** 달달하게 코코아도 한 잔 타줘. 마시멜로 잔뜩 올려서.”

“…….”

기가 차서 필라스는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축축한 옷감이 그가 입은 옷까지 축축하게 만들어도 발이 붙잡힌 채로 아퀼라만 빤히 쳐다보았다. 그럼에도 당당하게 주문을 마친 아퀼라는 필라스를 몹시 언짢게 할 만큼 괘씸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뒤집어 쓴 수건 아래로 비죽비죽 입술을 비틀어 웃는 아퀼라는 안 가고 뭐하냐? 라고 묻는 듯 턱짓을 했다. 필라스는 당장이라도 소리를 지를 듯 입을 크게 벌렸다가, 이내 눈을 질끈 감고 고개를 홱 돌렸다가, 쿵쾅거리는 걸음으로 문 밖을 나섰다. 활짝 열린 문 사이로 한기가 조금 스며들다 이내 쾅 닫혔다. 승자의 기분을 맛보는 쪽이 어느 쪽인지 명확하게 갈리는 순간이었다.

“하여간에.”

주방으로 내려오고서도 필라스는 내내 투덜거렸다. 그러면서도 손은 충실하게 코코아 가루를 꺼냈고, 한편으로는 냄비에 우유도 부어서 뜨끈하게 데웠다. 우유가 끓기를 기다리며 냄비의 귀퉁이를 주걱으로 탕탕 내리치던 그는 무언가 생각이 났는지 급하게 도마와 칼을 찾았다. 쓸 일이 그리 많지 않아 한쪽 구석에 처박혀 있는 작은 쌀가루 포대도 끄집어냈다. 그는 대충 어림짐작으로 쌀가루를 도마 위에 붓더니 물을 조금 타 반죽 한 덩어리로 만들었다. 그러다 우유를 부어둔 냄비에서 치이익 소리가 나자 잽싸게 불에서 치웠다. 그리고는 이어서 만들어두었던 반죽을 몇 덩이로 나누어 동그랗게 모양을 잡았다. 코코아는 이미 그의 안중에서 사라진 듯 했다.

필라스는 큼직한 냄비를 꺼내 물을 잔뜩 담아 불에 올린다. 그리고 칼을 챙겨 들고 매달아둔 고기를 큼지막하게 자른다. 자른 고기를 자르지도 않고 냄비에 풍덩 담가버린 다음에 필라스의 손에 들린 것은 끄트머리가 살짝 부스스하게 마른 파와 양파다. 우선 파 한 줄기를 통째로 큼직하게 썰어낸 그는 양파도 척척 4등분해서는 한꺼번에 냄비 안으로 우르르 쏟아 붓는다. 그 위로 후추와 으레 넣을 법한 조미료들을 적당히 털어내 뿌린다. 모락모락 끓기 시작하면서 피어오르는 기름기 낀 거품들을 떠내던 그는 한참을 더 끓게 내버려둔다. 그리고는 마침내 적당히 때가 되었다고 생각할 때 그는 뜰채로 냄비 속에 녹지 않고 둥둥 떠다니는, 푹 익어 절어버린 양파와 파, 고기를 한꺼번에 건져낸다. 그 중 고기만 남기고 죄다 버려버린 필라스는 채 식지 않은 고기를 적당히 한 입 크기로 찢듯이 썰어 도로 냄비에 넣는다.

그리고 도통 돌아올 줄 모르는 코코아를 수금하러 쳐들어온 노란 귀신이 노호했다.

“야! ** 너 ** 무슨 카카오부터 따냐? 는 이게 무슨 냄새야?”

“어 너는 못 먹는다.”

“** 뭐래.”

“네가 싫어하는 거 다 들어갔어.”

“야! ** 내가 사람이 먹을만 한 거 만들랬지!! 누가 ** * 공들여서 쓰레기 만들래 이 ** **** **!!”

아퀼라는 사람이 공들여 만든 것에 대놓고 쓰레기라고 가차없이 평가를 내린다. 편견 섞인 평가는 귀에 담지도 않은 필라스는 다만 냄비 속만 휘휘 저을 뿐이었다. 주방을 꽉 채울 듯 넘실거리는 푹 삶은 고기의 냄새에 홀린 듯, 테이블을 빙빙 맴돌기 시작한 아퀼라는 이제 코코아따위는 새까맣게 잊은 듯 했다. 불 위에서 바글바글 끊는 고깃국을 호기심 넘치는 눈으로 흘끔, 반면에 그 옆에 덜어냈던 파와 양파가 푹 익어 널부러져 있는 그릇을 찡그린 눈으로 흘끔, 쳐다보던 아퀼라는 다시 냄비 속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맑은 고기 육수가 가득한 냄비 속은 모르는 사람이 보면 영락없이 푹 우린 고깃국으로만 보일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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