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둥새] 그건 네 사정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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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그건 가히 재난이었다.

죽이는 것과 살리는 것, 부수는 것과 고치는 것. 그 중 자기와 가까운 것을 고르라면 단연 전자를 고를 필라스에게 시시각각 상태가 급변하는 중환자의 간병은 퍽 난감한 일이었다. 이름도 모르는 금발의 템플러는 며칠 째 인사불성이었고, 열도 오르락내리락했으며, 상처는 나을 만하면 터져서 피를 줄줄 흘렸다. 뭐에 당하면 이렇게 되는 거지? 짐작 가는 바도 없었다. 전날 밤에 갈아둔 침대 시트가 또 다시 피에 절어있는 것을 보고 필라스는 고민에 빠졌다. 안면을 튼 사이도 아니고, 심지어는 그의 것을 훔친 도둑인데. 이 지극정성을 해가면서 구해놓을 이유가 있나?

그것은 요 며칠 필라스를 가장 귀찮게 하는 물음이었다. 그는 길가에 쓰러진 사람을 보았다고 기꺼이 손을 내미는 성인군자도 아니었고, 모르는 사람에게 기꺼이 무언가를 선뜻 내어줄 수 있을 만큼 너른 성격을 가진 것은 더더욱 아니었다. 그럼에도 하루만이라도 바깥에 내어놓았다간 바로 숨이 끊어질 만한 반시체는 왜 살리겠다고 부득불 끌어다 눕혀놨을까. 답이 나올 턱이 없는 꼬리에 꼬리를 무는 고민은 그대로 이어지게 내버려둔 채로, 필라스는 환자가 누워있는 상태 그대로 침대에서 시트를 확 빼내버렸다. 어차피 금세 피로 얼룩져버릴 거, 시트를 깔아두는 것도 아까웠다. 혹시나 아무는 데 도움이 될까 해서 붕대를 감아두는 것도 엊그제부터 때려치워버렸다. 나중에 눈뜨면 저놈을 부려먹어서 침대 값을 하게 만들어야지.

“…….”

그 전에 이 녀석 일어나긴 할 수 있는 걸까. 이 고생을 하고 시체 치워야 하는 거면 골치 아픈데. 그럴싸한 가정 하나가 필라스의 머리를 스쳤다. 성가신 게 굴러들어왔어. 인상을 잔뜩 찡그린 채로, 필라스는 자기만큼이나 창백한 안색의 템플러에게 손을 뻗었다. 곧게 뻗은 코 아래로 드나드는 극히 미약한 숨결이 차게 식은 손끝에도 닿았다. 지금 당장은 이 이상을 기대하기도 어려울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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