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라비] 헤매는 것은 무얼 잊었는지도 모르기 때문에

 

헤매는 것은 무얼 잊었는지도 모르기 때문에 (22/8/3)

 

 페일드라스가 그 주점에 드나들게 된 것은 얼마 되지 않은 일이었다. 단지 어디선가 소개를 받았을 뿐이었다. 생각없이 앉아서 시간 때우다 가기 좋은 곳이라고. 그래봤자 시끄럽고 번잡스럽기만 하겠지, 한 것도 웬걸. 확실히 혼자 오는 사람도 많은 가게 안에서 타인의 소음은 서로를 상쇄해 지워줄 만큼 적당히 시끄러웠고 오고가는 사람들에게 누구도 딱히 일일히 관심을 주지 않았다. 군중 속의 고독이라고 할까. 구분되지 않는 왁자지껄한 소음들이 밀물처럼 밀려 들어오다가 어느새 다시 스쳐 지나가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사이에서 페일드라스는 금세 중심을 잃지 않는 방법을 터득할 수 있었다. 그러자 자연스럽게 이 주점은 페일드라스의 집과 직장과 집 사이 루틴에서 일정한 시간을 차지하게 되었다.

 이 주점에서 가장 눈에 띄지 않는 듯, 눈에 띄는 듯한 것은 비정기적으로 근무하는 한 빨간 머리를 한 점원이었다.

 근무는 하니까 점원이라고 해도 되겠지. 이 작자는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근무를 하는지도 모를 지경이었다. 근무 날짜고 근무 시간이고 뒤죽박죽이었다. 가게 운영 겸 바텐더로 바 테이블 쪽에서 쉐이커를 흔드는 마스터에게 물어보면 언제부턴가 자연스럽게 그리 되었다고 했다. 넉살도 좋고 고객 접대도 좋고 실력도 좋아서 별 다른 터치를 하지 않는다고도. 퍽이나. 페일드라스는 절로 그 말에 코웃음을 쳤다.

 “웬일이래?”

 “뭐가?”

 “여태 여기 들어와서 누구한테 관심이나 준 적이 있어야 말이지.”

 뭔 소리를 하나 했더니. 페일드라스는 눈살을 찌푸렸다. 관심을 주고 싶어서 준 것이 아니었다. 멋대로 그 쪽에서 다가와서 환장할 소리를 지껄여대서 그런 거지. 그 때만 생각하면 아직도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그 날은 주인 대신 예의 그 빨간머리 점원만 홀로 바 테이블에 서서 주문을 처리하고 있었다. 비도 오고 했으므로 사람이 별로 오지 않아 혼자서도 가능한 모양이었다. 쉐이커를 흔들고 잔에 따르고 또 다시 돌아온 빈 잔을 씻는 손은 분명 잘 알지 못하는 페일드라스의 눈에도 제법 야무져 보였다. 그 점원은 들어오는 주문 순으로 칵테일을 만들어 내밀면서 싱글싱글 잘도 웃었다. 손님들과 뭐라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던 그는 바쁘게 오가는 사이에 귀를 덮고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넘기다 페일드라스와 눈이 마주쳤다. 뭘 봐, 하던 대로 다른 사람 상대나 하라고 페일드라스가 눈을 돌리면 우스워하는 목소리가 청량하게 그의 귓가에 내리 꽂혔다.

 ‘이런 데를 와서까지 굳이 맥주만 마셔? 술 먹을 줄 몰라?’

 ‘…….’

 대뜸 대거리부터 걸어오는 게 아닌가. 그 전까지 페일드라스는 맹세코 이 점원과 말 한 번 붙여본 적이 없었다. 이 새끼가 내 뭘 알고? 어처구니가 없어져서 잔에 남아 있는 맥주를 한 입에 털어넣고 내려놓자마자 점원은 잽싸게 빈 잔을 채갔다. 이건 또 뭐야. 페일드라스가 한쪽 눈을 치켜떴다. 짙게 선팅된 바이저를 끼고 있는데다 한쪽 눈을 거의 가리듯이 길게 내린 앞머리로 인해 잘 알아보지는 못하지만 그가 눈을 찌푸리면 으레 주변 사람들은 눈치껏 잘도 알아보고 알아서 물러났다. 그러나 지금 여기서는 주변까지 어두워 더 못 느끼는 것인지 아니면 유난히 이 점원의 담이 큰 것인지 그는 페일드라스가 시키지도 않은 짓거리를 해댔다.

 ‘그냥 맥주만 먹을 게 아니라, 여기다 진저에일이라도 타서 먹으라고.’

 ‘별…….’

 점원은 페일드라스의 자리 앞에 반쯤 남아 있는 맥주 병을 들고 가늠해보더니 냉장고에서 진저에일 한 병과 텀블러 글라스를 가져왔다. 차갑게 얼어 하얗게 김이 서리는 글라스에 맥주를 먼저 반 따르고, 그 다음으로는 진저 에일을 따라 마저 잔을 채웠다. 그렇게 완성한 잔을 코스터를 깔아 새로 내밀었다. 시키지도 않은 짓을. 그래놓고 점원은 내가 내주는 거니까 돈 걱정은 하지 마, 따위의 웃기지도 않은 말을 주절거렸다.

 애초에 페일드라스는 맛으로 입에 대는 것을 즐긴 적이 없었다. 뚜렷하게 맛을 구분하지도 못했다. 술을 마시는 것도 얼음으로 차게 식힌 음료를 목에 부어 하루 치의 피로를 푸는 것에 불과했다. 술이 아니라 커피든 다른 것이 되었든 상관없을 것이다. 그러나 커피는 피곤함을 풀기는 커녕 정신을 예민하게 만드니 술이 되었을 뿐. 그러니 이 쓸데없는 간섭이 썩 달갑지 않은 페일드라스는 얼른 이 쓸모없는 잔을 비워버릴 생각만 했다.

 ‘…….’

 ‘맛있지?’

 목이 얼어붙을 정도로 찬 것을 반 넘어 비웠을 때 페일드라스는 깐족거리는 점원의 말에 쉬이 반박할 수 없었다. 여전히 맛은 잘 알 수 없지만, 좀 더 부드러운 것이 뭔가 평소보다 더 마실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그렇다고 부러 찾아 먹고 싶은 것은 아니라서, 그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고 내용물만 연거푸 비웠다. 그리고 제 앞에서 물러나지도 않고 거슬리게 구는 점원에게 다 비운 잔을 떠넘겼다. 그러나 이 점원은 참으로 끈덕지게 늘어졌다. 다른 손님도 많은데 그 쪽이나 보러 가지. 페일드라스에게는 성가시기만 했다.

 ‘더 줄까?’

 ‘그것도 네가 낼 거면.’

 ‘내 한 시간 시급을 다 털어먹게?’

 우리가 아직 그런 사이는 아닌 것 같은데. 이제와서 한다는 말이 그 따위였다. 그럼 그 전까지는 그럴 만한 사이여서 그랬나? 서로 이름도 터놓지 않은 완전 지나가는 타인 사이에 불과하면서. 페일드라스는 진저에일과 섞고 두어 모금 정도 남은 맥주병을 집었다. 점원이 미처 말리기도 전에 그는 가볍게 병째로 남은 것을 털어 넣었다. 그리고 다시 점원을 바라보면, 그는 못 볼 꼴을 봤다는 듯 으으 소리를 내며 오만상을 찡그리고 있었다.

 ‘돈 없어서 그러는 거면 내가 그냥 내준다.’

 ‘그러던가.‘

 페일드라스가 물론 그만한 돈이 없는 것은 아니고. 단지 이 정도로 정 떨어질 말을 하면 이 망할 점원도 그만 떨어지지 않을까 예상한 까닭이다. 그러나 놀랍게도 이 점원은 퍽 유하게 똑같은 칵테일을 만들어 페일드라스에게 건네주었고, 그 다음으로도 계속 뭐라고 말을 붙여왔다. 흘려듣기도 하고 건성으로 대답하기도 해서 페일드라스는 대화 내용을 세세히 기억해두지 않았지만 자리를 박차고 나갈 수도 있었던 것을 계속 받아쳐줬던 점으로 보아 분위기는 분명 나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확실히 그 점원은 가게 주인이 말할 정도로 넉살도 좋고 성격도 퍽 좋을 것이다.

 페일드라스 레겐베르크라는 개인에게 전혀 상관없는 주점 점원이라는 타인이 어떠하든 무슨 상관이겠냐만.

 여전히 페일드라스는 그의 이름조차 알려 하지 않았다.

 “뭐, 네 연락처라도 전해 줘?”

 “뭐?”

 “네가 처음은 아니거든. 걔한테 관심 보이는 게.”

 생각지도 못한 말에 페일드라스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사적으로 알고 싶다는 것까지는 아니었다. 요즘 너무 자주 그 인간 근태를 물어본 탓인가, 싶었다. 그야 뭐 아무리 거슬려도 있던 사람이 오래 안 보이는 건 좀 이상해서. 출근이 들쭉날쭉하다고 해도 하루 이틀 비우는 정도였지 갑자기 한 주를 통틀어 모습을 안 보인 때는 없었다. 그게 이상해서 물어본 것이었지만 이상한 오해를 사느니 묻지 않을 것을 그랬다. 그럼에도 가게 주인은 별별 소리를 해댔다. 뭐 이상한 놈팽이는 걔가 알아서 거르기도 하고 내 선에서 치우기도 하지만 너 정도면 멀쩡하기도 하고. 그러니까 요컨대 이런 적이 처음은 아니라는 거지. 오늘도 별 쓸데없는 것을 알아버렸다.

 “가게 손님하고 그렇게 사적으로 관계를 만들어도 되나?”

 “걔 나름대로는 부업같은 거니까.”

 부업? 페일드라스는 평범한 그 단어가 주는 결코 일반적이지 않은 미묘한 울림에서 더 쓸데없는 정보를 알게 될 것이라는 직감을 느꼈다. 굳이 그 이상의 것을 추측하려 하지 않으려 애쓰면서 그는 늘 먹던 대로 맥주를 연거푸 비웠다. 오늘따라 이상하게도 꽉 막힌 것 같은 것이 좀처럼 내려가지 않았다. 페일드라스는 스스로 그리 복잡하지 않고 단순하다 여기고 있었다. 그러니 주면 주는대로 속이 풀려야 맞는 건데. 오늘은 쉬이 넘어가지 않을 것 같았다.

 이해할 수 없는 갑갑함은 심히 무거웠다. 페일드라스는 잠깐 바깥으로 나와 담배까지 태울까 나온 곳에서 뜻밖의 인물과 마주쳤다.

 “뭐야 들켰네.”

 가게 옆 칸에 딸린 흡연구역에는 이미 선객이 있었다. 그것도 그렇게 존재감을 나타내다 일주일은 안 나왔던 예의 점원이. 페일드라스는 유니폼이 아닌 평상복을 입은 그가 퍽 낯설게 느껴졌다. 오로지 낯익은 것은 특유의 껄렁한 웃음 뿐이었다. 출근을 할 거면 가든가, 언제부터 여기에 있었던 건지. 페일드라스가 빤히 보건 말건 그 점원은 다 태운 담배꽁초를 재떨이에 비벼 껐다. 그러고는 바지 뒷주머니에서 다시 담뱃갑을 꺼내들었다. 몇 번이나 조그만 상자를 흔들던 그는 이내 그것을 꾸깃 구겨버렸다.

 “아, 그게 끝인 줄 알았으면 천천히 피울걸.”

 “하나 줘?”

 혼잣말을 중얼중얼 늘어놓던 점원은 페일드라스의 한 마디에 놀란 눈을 했다. 마치 그 사이에 그의 존재를 잊은 것처럼. 몇 번인가 입술만 달싹이던 점원은 이내 좋아,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짧게 자른 붉은 머리카락이 고갯짓에 따라 흔들리는 것을 곁눈질로 보던 페일드라스는 어렵지 않게 제 담뱃갑에서 하나를 빼내어 점원에게 건네주었다. 고마워. 들릴 듯 말 듯한 조그마한 목소리로 감사를 표한 그는 냉큼 페일드라스의 손에서 가느다란 연초를 가져갔다. 익숙하게 바로 불을 당겨 붙인 점원은 마치 숨을 쉬듯 입에 문 필터를 쭈욱 빨아들였다. 그 모습을 보자 페일드라스는 불쑥 한 마디 해주고 싶었다.

 “왔으면 출근이나 하지 여기서 뭐 하고 있어?”

 “뭐야, 내 걱정하는 거야?”

 그럴 필요는 없는데. 라고 완전히 어긋난 헛소리를 하던 점원이 키득키득 웃었다. 페일드라스는 그럴 리가 있냐고 딱 잘라 끊었다. 그러자 점원은 어처구니 없는 얼굴을 했다.

 “그러면 그런 얘기는 왜 해?”

 “거슬리니까 한 말이지.”

 그러나 그 말은 그리 자기의 귀에도 신빙성 있게 들리지 않았다. 말한 본인도 그러한데 듣는 사람은 어떨까. 그러나 점원이 으레 하는대로 히죽거리는 얼굴은 꼴도 보기 싫었으므로 페일드라스는 일부러 가게 쪽을 향해 등을 돌리고 서서 담배를 입에 물었다. 이 주점의 흡연구역은 가게와 맞닿은 벽으로 가게 안이 잘 보였다. 반대편에서는 그저 까만 유리로만 보였다. 들어올 때마다 참 특이하다 생각은 했어도 한 번도 그 이유에 대해 생각해 본 적 없는 페일드라스의 뒤로 점원의 목소리가 들러붙었다.

 “그 벽. 마스터가 가게 열려고 샀을 때부터 그 모양이었대.”

 “…….”

 “악취미지.”

 뭐가. 라고 묻지도 않았다. 페일드라스는 불쑥 치미는 불쾌함을 누르기 위해 애를 써야 했다. 이 도시 뒷편에 도사리는 어둠 중 어떤 면은 그 또한 숱하게 접해야 했던 때가 있었다. 아직 스스로 자기 인생에 관한 선택권이 많지 않았던 시절에. 돈만 보고 저지를 수밖에 없었던 어떤 일들을.

 “뭐, 아무튼 저 벽때문에 가게 안에 이미 당신이 있는 걸 알아서.”

 “……못 들어 주겠군. 그럼 그동안 안 나온 게 내 탓이다?”

 “어라 그게 그렇게 되나? 내 말은, 음……얼굴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는 거야.”

 페일드라스는 홱 뒤를 돌아보았다. 그의 뒤에는 언제나 자신만만해하는 얼굴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전혀 모르는, 이 분위기를 어색해하는 사람이 있었다. 언제나 먼저 고개를 돌리던 건 페일드라스였는데. 지금은 저쪽에서 눈도 마주치지 않고 있었다. 무슨 말이라도 하지. 저번처럼 뻔뻔하게 굴지. 대체 저 잘못해서 혼날 걸 아는 어린애같은 얼굴은 뭐냐고.

 무시해야 했다. 페일드라스는 한 번 그에게 손 대면 다시는 되돌릴 수 없을 것을 직감했다. 거의 본능에 가까운 그 감각은 한 번도 어긋난 적이 없었다. 이름조차 알지도 못하는 이에게 신경 써줄 이유는 없었다. 스쳐 지나갔던 다른 이들처럼 대해주면 되는 간단한 일이. 왜 이다지도 와닿지 않는지.

 꼭 마치, 그렇게 대해서는 안 되는 사람같이.

 페일드라스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네가 여기서 뭘 했는지는 내 알 바 아니야.”

 “그래.”

 “하지만 네가 말하고 싶으면 마음대로 말해. 그건 네 자유니까.”

 페일드라스는 다 태우지도 않은 담배도 버렸다. 점원은 의아한 얼굴이 되었다. 그걸 들어서 뭐 하게, 라고 묻는 것 같기도 했다. 그걸 들어서 뭘 할지. 어떻게 될 지는 페일드라스 또한 이 다음을 알 수 없었지만.

 “너, 우선 이름은 뭐야?”

 그렇게 페일드라스 레겐베르크의 빈 여백에 스트라디바 라벤도르프가 성큼 스며들었다.

 

 

답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