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렌비스] 사랑 대신 또 사랑을 해

 

사랑 대신 또 사랑을 해 (22/8/11)

 

아르카비스는 앉아있는 책상 위에 놓인 것들을 새삼 보았다. 널려 있는 것들은 아까 전 그가 읽고 싶어서 책장에서 빼온 책들이었다. 그러나 이 위에는 그가 고르지 않은 것들이 더 많이 올라왔다. 어딘가 가게에서 신상으로 나왔다는 디저트들이. 어울릴 것 같아서 골라봤다는 장신구들이. 전에 한참 쳐다보길래 갖고 싶어하는 것 같아 사왔다는 선물들이. 같이 보고 싶어서 골라왔다는 영화 테이프들이. 풋풋한 사랑을 고백하는 소년처럼 천진난만한 표정을 한 에쉬레스토는 언제나 당신을 위해서, 라고 포장한 말로 맹목적인 자기 감정을 아르카비스 앞에 늘어놓았다.

아르카비스는 그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 않으면.

그의 선택을 받지 못하면, 그것들은 금세 날선 파편으로 돌변해버리는 까닭이었다.

천진한 얼굴을 한 청년은 눈이 깜빡하는 것보다 조금 빠르게 매서운 눈을 하고 사냥감을 노리는 맹수로 탈바꿈했다. 그리고는 엔간한 것에도 겁을 먹지 않는 아르카비스조차 찔끔할 정도로 서늘한 한숨을 내뱉었다.

‘필요없다 하시니 어쩔 수 없네요.’

누구도 그렇게 말한 적 없건만 에쉬레스토는 가져온 것들을 아르카비스가 보는 앞에서 우르르 떨어뜨려서는 자근자근 밟아 아주 작살을 내버렸다. 아르카비스가 아닌 누구도 쓸 수 없다는 것처럼. 지금 부서지는 것은 물건 자체가 아니라 전혀 다른 것이라고 보여주듯이. 어쩌면 그의 발밑에서 부서지는 것은 다른 것이 되었을지도 모른다는 것처럼.

아르카비스는 판단할 수 없었다. 단지 그를 생각해서 가져왔다는 이유만으로 굳이 모든 것을 받아들여야만 하는가?

에쉬레스토는 올곧게도 속삭여댔다. 이것 또한 그가 사랑하는 방법이라고.

아르카비스에게 사랑이란 것은 몹시도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 되었다. 그러나 부서지기 전에 반짝이던 것들은 분명 아름다운 것이었으므로. 그것들이 모진 발길질에 으스러지는 것은 몹시 딱하게 보였다. 가엾게 여겨야 할 것 같았다. 그러니 그는 건네받는 것들을 가만히 받아주었다. 기쁜 듯 웃어주었다.

이윽고 웃는 것이 습관이 되었을 무렵에 아르카비스는 이게 올바른 것이라고 납득하고 있었다. 어떤 것도 부서지지 않았고, 어떤 것도 망가지지 않았다. 손도 대지 않은 어떤 것이 바스러지고 있어도 돌아보지 않았을 뿐이었다. 돌아볼 틈도 주어지지 않은 채 맹목적으로 이끌고 걷는 발걸음에 맞춰 힘겹게 맞춰 걸을 수밖에 없었다.

학습의 루틴이 끝나고 맥없이 풀려났을 때, 아르카비스는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자기의 영역이었고 어디서부터 에쉬레스토의 영향이 미쳤는지 분별할 근거를 찾을 수 없었다.

모든 것이 그 자체로 완벽했다.

아르카비스는 숨막히게 화려해진 제 주변이 순식간에 무너질까 두려워 쉬이 손댈 수도 없었다.

“…….”

가져온 책 중 가장 단순하고 심플한 표지를 한 가벼운 책을 쓸어보던 아르카비스는 결국 그 책을 펼치는 데 실패했다. 부질없이 책등만 손끝으로 쓸다가, 이내 단념하고 몸을 일으켰다. 지이익 끌리는 의자 소리가 몹시도 무거웠다.

“어디 나가시게요?”

갑작스럽게 에쉬레스토가 뒤에서 말을 걸어왔다. 실상 잘못한 것은 아무것도 없음에도 아르카비스는 뭔가 잘못을 숨긴 어린아이처럼 어깨를 들썩이며 홱 뒤를 돌아보았다. 활짝 열린 문 사이를 가로막듯 비스듬히 선 에쉬레스토는 재미있는 것을 본 양 키득키득 웃고 있었다.

“왜 그렇게 놀라요? 책에 그렇게 집중하고 계셨나?”

“예고도……없었으니까.”

“아하, 이런. 저는 점심 뭐 드시고 싶으신가 물어보러 온 건데.”

좀 이따 올 걸 그랬네요. 에쉬레스토는 머쓱한 듯 뒷머리를 긁적였다. 아르카비스는 또 다시 그리 원하지 않는 선택지가 제 손에 쥐어졌음을 알고 눈을 찡그렸다. 그는 저에게 기호란 상관없는 단어로만 보였다. 게다가 애초에 먹지 않아도 되는 것은 에쉬레스토가 더 잘 알고 있을텐데.

왜 항상 의미 없는 것만 잔뜩 가져와 부려놓는지.

아르카비스는 에쉬레스토의 사랑이라는 것이 오늘도 어김없이 퍽 버거웠다.

“네가 먹고 싶은 거.”

“전에 그래놓고 안 먹었잖아요.”

“이번에는 다를지도 모르지.”

아르카비스는 단조롭게 대답했다. 그가 유일하게 아는 사랑에 대해 대답해줄 수 있는 그의 마음을 담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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