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둥새] 2023 할로윈

 필라스는 여느 때처럼 소파에 드러누워 있었다. 손으로는 활짝 편 책을 지탱하는 채로. 발은 연신 까닥거리면서. 그럼에도 눈은 마땅히 책에 콕 박혀 읽혀지길 기다리는 활자를 쫓는 게 아니라 바깥을 향했다. 뭘 하는지, 그의 동거인께서는 오늘도 부지런히 달음박질 치며 종이들을 나르고 모으는 듯하다. 아퀼라가 두서없이 무언가를 모으는 것이 어제오늘 일은 아니었으니 신기할 것은 없었으나…….

 ‘무슨 종이를 저렇게 또.’

 대충 보기에도 종이의 크기가 제각기 달랐다. 게다가 하나같이 낱장이라니. 필라스는 저러다 한 장 잊어먹지, 뭐라고 해주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자기가 알아서 할 일이다.

 그렇다고 하여, ‘너같은 건 몰라도 돼!’ 같은 모습을 보면 골려주고 싶은 마음이 없다가도 생기는 법이라. 집주인으로서 집에 드나드는 물건이 어떤 것인지는 알아야지. 마음에도 없는 핑계를 대며 필라스는 거침없이 아퀼라의 비밀창고에 손을 대었다. 언젠가 청소를 하다 우연찮게 발견한 것이다. 언제나 그러했듯 그리 대단한 것이 들어있는 것은 아니고.

 “요리책이라도 낼 건가.”

 이번에 모으는 것들은 어쩐지 온갖 레시피가 적힌 종이인 모양이다. 그것도 하나같이 달달한 사탕이나 과자들로. 어떤 것은 필라스도 익히 잘 아는 것이고, 어떤 것은 처음 듣는 것이기도 했다. 이런 걸 집에서 만들 수 있다고? 의구심 넘치는 눈으로 종이를 팔락팔락 넘겨가며 확인하던 때에 필라스는 문이 덜커덕 열리는 소리를 감지했다. 이런 젠장. 들켜서 좋을 게 없는 현장을 본래 모습대로 돌려놓은 그가 다음으로 행한 일은 창문으로 빠져나가 지붕으로 올라가는 것이었다. 실내 안에서 완벽하게 몸을 감추어봐야 그걸 못 알아볼 아퀼라가 아니었으므로.

 “악!”

 급격하게 몸을 굴리는 일은 애석하게도 지금의 그에게는 전혀 맞지 않았다. 처마 끝자락에 기어코 발을 찧은 필라스는 줄줄 비명이 새어나오는 입을 손바닥으로 틀어막았다. 잠깐만, 이렇게까지 해야 할 일이었나? 하지만 깨달음은 언제나 늦게 찾아오는 법이다.

 “이게 ** 무슨 냄새람.”

 미처 닫지 못하고 나온 창문이 다시 활짝 열리는 소리가 발밑에서 난다. 그러더니 다시 무언가가 와르르 쏟아지는 소리가 나나 싶더라니 종이들이 부스럭거리는 소리도 연달아 들린다. 필라스는 반대편 창문 (그러니까 그의 방) 으로 내려가려다 뜻밖의 소리에 발목이 잡혔다.

 “이 박쥐 녀석은 또 어딜 간 거야, 오늘 나간다는 말도 없었는데.”

 목소리가 들리는 위치로 짐작하자면 아퀼라는 창문 바로 뒤에 서 있는 것 같았다. 그가 창문 바깥으로 고개라도 내밀었다간 ‘너 거기서 뭐하냐?’ 따위의 질문을 꺼낼 것이고, 그에 대해 둘러댈 핑계가 하나도 준비되지 않은 필라스는 최대한 조용히 몸을 뒤로 물렸다. 그렇게 쓸데없이 긴장감으로 몇 분인가 시간을 날린 후에야.

 “아 꼭 찾으려면 없어. ** 자기가 진짜 모기인 줄 아나 필요없을 때만 왱왱거리게.”

 난데없는 욕만 얻어먹고 창문이 쾅 닫혔다. 저걸 콱. 필라스는 어안이 벙벙한 눈을 하고서는 입으로는 낼 수 없는 욕짓거리만 수십 가지를 주워섬겼다. 분풀이가 끝난 다음에는 내려갈 것이 제일 문제여서. 필라스는 오늘도 의지만 있으면 신체 구조가 바뀌지 않을까 하는 헛된 기대를 걸었다가, 부질없이 제 방 창문으로 낑낑 기어내려갔다. 몇 번인가 미끄러지고 눈앞이 아찔해지는 순간을 맞이하고서야 그는 간신히 단단한 마룻바닥 위를 디디고 섰다. 그렇게 한숨 돌리려던 찰나에 그는 막판에 심장을 토할 뻔했다.

 “어디있다가 여기서 튀어나왔을까?”

 “――!!”

 미친 거 아니야! 필라스는 속으로는 기함을 하면서도 간신히 비명을 지르려는 턱에 힘을 실었다. 비명은 아니더라도 불이라도 뿜었다가는 큰일이 된다. 그러거나 말거나 그건 자기가 알 바 아니라는 양 아퀼라가 성큼 다가와 그의 허리께를 콱 잡았다.

 “여하간 찾았으니 됐지. 이제 너한테 시킬 일이 아주 *** 많으니 따라와라.”

 “또 뭘 하려고.”

 “네가 할 줄 아는 재주가 많은 것도 아니고. 간단한 몇 가지만 거들면 돼.”

 부탁하는 태도가 오늘도 아주 글러먹었다. 필라스는 방자하게 거들먹거리며 앞서 나가는 아퀼라의 등 뒤를 사납게 째려보았다. 뒷통수에 눈이 달리지 않은 건 확실한데, 시선이 따갑기는 했는지 아퀼라가 눈치 좋게 홱 돌아보는 탓에 필라스는 금세 딴청을 부렸다. 그는 입도 뻥긋 안했건만, 아퀼라는 기세등등하게 한 걸음 한 걸음 다가와서는 필라스의 허벅지를 냅다 걷어차버렸다.

 “악!! 이게 진짜!!”

 “그러게 왜 늑장을 부려?”

 필라스가 뭐라 고함을 지르건 아퀼라는 시종 히죽거릴 뿐이었다. 그에 맞서는 필라스도 점점 이죽거리는 얼굴이 되어서는 비꼼이 작렬하는 유치한 공방을 하다 급기야 두 사람의 손은 서로의 머리칼을 향해 뻗어나갔다. 이윽고 방 안을 가득 채우는 날카로운 비명과 매서운 협박이 한참이나 이어졌다.

 “먼저 놔라!”

 “** **** 네가 먼저 놔!”

 “웃기시네!”

 “손목 하나 날아가도 상관없지 아주 * ***?!”

 “그만, 잡아당겨! 망할 자식아!”

 ……그리 유익한 시간은 아니었다.

 

 

 거실에 놓인 커다란 테이블 위로 종이들이 즐비했다. 개중 한 쪽에는 필라스는 흥미도 두지 않은 축제의 홍보지, 다른 한 쪽에는 알록달록한 과자들의 레시피가 적힌 종이들로. 그걸로 충분히 설명이 되었다는 듯 테이블 끝에 기대 앉은 아퀼라가 희희낙락하고 있었고 소파 위에 앉은 필라스는 그만큼 저승의 문이라도 보는 얼굴로 종잇장들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는 간신히 한 마디만 내질렀다.

 “이걸 나 혼자 어떻게 해!”

 “못 해?”

 “되겠냐 그럼?”

 한 차례의 폭풍이 지나간 뒤에도, 아퀼라와 필라스 둘 사이에는 또 다시 으르렁거리는 기류가 형성되고 있었다. 먹고 싶은 과자 레시피를 다 물어와서는 그 중에 쉬워 보이는 것으로만 특별히 골라왔으니 만들어서 바치란다. 누가 그런 사서 고생인 짓거리를! 필라스가 시선 하나 주지 않고 홱 고개를 돌려도 아퀼라는 상관없다는 듯 팔랑팔랑 레시피가 적힌 종이를 흔들어댔다.

 “그래서 해? 안 해?”

 “안 한다 했다.”

 “그래?”

 필라스는 흘끗 아퀼라를 살폈다. 그의 표정은 여전히, 앞으로 영원히 알 수 없을 짓궂음으로 가득 차 있었다. 하여간, 웬수같으니. 떨떠름하게 시선을 피하자 아퀼라는 기다렸다는 듯 짐짓 엄숙하게 선고를 내렸다.

 “그러면. 그간 내 방에 멋대로 드나든 죄까지 포함해서 밤새도록 ** 재미있게 놀아줘야겠지?”

 “뭐?”

 “내가 그럼 모를 줄 알았냐? 이 음흉한 박쥐 놈아.”

 무작정 잡아떼기 어려운 추궁에 필라스는 말문이 막혔다. 해볼 말이 있으면 해보라는 듯이 아퀼라가 고개를 까닥였다. 그럼에도 그는 결국 가뜩이나 창백한 낯을 더욱 하얗게 질린 안색으로 입을 다물어버렸다. 잠깐만, 그럼 아까는 이자식이 알고도? 저지른 잘못은 일단 덮어두고서 필라스는 어처구니 없는 시선을 던졌다.

 “뭘 봐? ** 그러게 누가 다녀간 티 내래?”

 그렇다고 그것이 통할 상대는 아니었다. 더욱 냉랭해진 시선만 받고 필라스는 결심을 굳힐 수밖에 없었다. 됐다! 어차피 저 놈은 받을 때까지 물고 늘어질 놈이야! 분연히 마음을 굳힌 그는 종이들을 구겨질 정도로 꽈악 움켜잡았다. 그러나 그 각오가 무색하게도, 단숨에 그의 기세를 꺾을 만한 말이 날아들었다.

 “참. 내가 욕심이 많아서, 과자도 맛있게 먹고 재미있게 장난도 칠 거야.”

 “……미쳤냐?”

 “어 그런가봐~.”

 “야. 나가, 꺼져!”

 “어어 안 나가. 너 그리고 나한테 잘못 없는 것처럼 굴지 마라.”

 “너도 마찬가지잖아, 내 지갑 털어쓰고 있으면서!”

 그놈의 축제인지 뭔지, 시작하는 날부터 아퀼라는 필라스를 일분일초가 아까운 듯이 재촉해댔다. 돈을 갖고 있는 것은 필라스인데, 그는 사람이 몰려다니는 곳은 거북해했으므로 도통 가려고 들지 않은 까닭이다. 하여 필라스는 두어 번 따라가준 것을 이제는 귀찮아서 외출하는 아퀼라에게 아예 지갑을 맡겼더니 제법 무겁게 들려보내도 돌아올 때는 반쪽만도 못한 무게가 되곤 했다. 축제를 3번만 더 했다가는 집안 살림이 다 거덜날 판이다. 입으로는 그렇게 투덜거리지만, 필라스는 한 번도 아퀼라가 나가는 것을 막거나 못 나가게 하지 않았다. 글쎄, 대리만족이라도 하려고? 이따금 그는 제 마음 속조차 알 수 없었다.

 자기 스스로조차 모르는데 남의 마음은 어떻게 알까. 귀찮을 정도로 고집을 부리던 아퀼라는 이제는 테이블 옆 러그 위로 드러누워서는 소파 위로 척 다리를 올렸다. 더 정확히는 필라스의 무릎 위였다. 이건 또 무슨 짓거리지, 괴상한 것이라도 본 듯한 눈으로 필라스가 빤히 쳐다보건 말건 아퀼라는 안색 하나 달라지지 않았다.

 “야, 박쥐야.”

 “…….”

 “아 그래. 필라스. 플린아. 응?”

 안 들을란다. 필라스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그의 무릎 위에 불손하게 놓인 두 다리가 들썩이기 시작했으나 그것도 이내 잠잠해졌다. 그렇게 기세가 꺾이나 했더니. 건방진 아퀼라의 발꿈치가 기어이 그의 허벅지에 직격했다. 눈으로 쌍욕을 퍼붓는 필라스의 기세도 코웃음 한 번으로 날린 아퀼라는 벌떡 몸을 일으켜 앉았다.

 서로 한동안 입으로는 조잘조잘 투닥거리면서도, 기대에 찬 아퀼라의 시선 앞에서 필라스가 끝내 밀가루와 설탕을 끄집어 내는 것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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