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둥새] 같은 사람, 혹은

 ―그는 이따금, 아니 자주 집을 비웠다.

 필라스가 두꺼운 외출용 로브를 둘러쓰고 침실에서 나오자 아퀼라는 눈을 찡그렸다. 그는 장기간 집을 비울 때가 아니면 저 망할 로브를 꺼내지 않는다. 대번에 아퀼라는 부루퉁하게 말을 붙였다.

 “또 나가?”

 “왜? 엘프 꼬맹이는 혼자서 집 보는 것도 무서운가?”

 이유라도 물어볼라 치면 필라스는 늘상 그랬던 것처럼 사람 속을 뒤집는 소리만 해댔다. 아퀼라는 이번에도 어떤 정보값도 얻지 못하고 주인 없이 비어버린 집에 화풀이를 하고 마는 것이다. 무엇이 날아가 쨍하고 깨지는 소리를 뒤로 한 채로, 필라스는 가만히 머릿속 청구서에 적힌 금액만 올렸다.

 쿵, 문이 닫히는 순간 그는 울컥 치미는 감정을 익숙하게 목 아래로 삼켰다. 기실 집을 비우면서 아쉬울 것이 많은 사람은 필라스였다. 그야말로, 내가 내 집을 두고 어디로 가야 한단 말인가. 그는 애초에 그리 멀리 옮겨간 적도 없었다. 자기가 원하는 대로 조성해놓은 환경을 두고, 굳이 아까운 돈 써가며 좁아터진 여관에 장기 숙박하는 것도 귀찮았다. 그런고로 그는 이제는 푹신하게 깔아둔 건초더미 위에 누워 제 손을 밟고 지나가는 닭들을 멀거니 쳐다볼 뿐이었다.

 “하.”

 아퀼라가 잡혀있는 동물들에 대해서는 별 관심을 두지 않는 것이 다행이었다. 헛간의 관리에 대해서는 어떻게든 전적으로 제 소관으로 돌려 둔 까닭에―집 주인의 위신 추락이지 이건.―그는 이 안은 절대 살피지 않는다. 등잔 밑이 어두운 법이었다. 필라스는 닭들이 제 손에 머리를 비비게 내버려두다가 이내 끙 몸을 일으켜 앉았다. 매끈한 깃털이 여러 번 스친 감촉이 남아있는 손을 몇 번인가 쥐었다 폈다.

 본래 연소 물질이 없어도 자유로이 불꽃을 피워낼 수 있는 손은 이제 같은 위력을 내기 위해서 더 많은 과정을 필요로 할 것이다. 오늘 밤부터 한동안 그를 떠나지 않을 변화점은 그뿐만이 아니다. 팔도 평소보다 더 가늘어졌고, 다리 또한 그럴 것이다. 신체의 균형이 좀 더 날렵하게 재조합되는 한편, 가슴에서 느껴지는 무게도 상당히 늘었다. 달에 한 번 필라스가 겪어야 하는 체격 변화에 대한 인식은 그 정도였다.

 단지 그것 뿐인 일이었으나, 주변 사람의 시선은 가끔 그의 예상보다 폭넓게 때로는 극적으로 변화했다. 점차 필라스는 잘못된 것도 아닌 이 현상을 이따금은 숨겼다. 아퀼라에게도 예외는 아니었다.

 아마도, 생각보다 지금의 생활이 좀 더 마음에 들고 만 것 같았다. 어느새인지 모르게.

 필라스는 뭔가 숨겨야 하는 것도 맞지 않았다. 천성이 게으른 그는 감춘다는 것이 다른 때보다 더 많은 기력을 소진하게 만든다고 여겼다. 그러나 한 세기하고도 조금 더 지나는 동안 그의 솔직함이 오히려 독이 되는 순간을 더 많이 목격했을 때, 그는 결국 생각을 고쳐먹지 않고서는 버틸 수 없었다. 그런 끝에 나타난 사람이 아퀼라였다. 그의 작은 엘프 친구. 사냥감은 절대 놓치지 않는 재빠른 재주를 가진. 언젠가는 자기가 있던 자리로 돌아갈지도 모를. 결국은 완전한 타인.

 필라스의 상상 속에 있는 아퀼라는 두 모습으로 공존했다. 그를 비난하고 떠나가는 아퀼라와, 평소와 다르지 않은 아퀼라가. 떠오르는 빈도를 따지자면 언제나 전자가 후자를 압도했다.

 해가 지날수록 사라지는 것은 기력뿐만 아니라 솔직함으로 맞설 수 있는 용기 또한 사그라지기 마련이라.

 “모르겠다.”

 필라스는 풀썩 건초 더미 위에 쓰러졌다. 사실 아퀼라가 받아주건 아니건 그건 그에게 그리 큰 문제가 되지는 않을 터였다. 그래야만 하는데. 모처럼 다가온 사람의 온기란 또 포기하기가 쉽지 않아서. 어떻게든 유지하려고 애쓰는 스스로가 답답하더라도 다른 방법이 없었다. 차라리 아무 일도 없는 편이 나았다.

 팔을 휘적거리면 저번 달의 그가 대충 던져두었던 검의 손잡이가 손에 잡혔다. 화염 마법을 대신해 궁여지책으로 배운 검술은 그리 효율적이지는 못해도 어디서 지고 다니지는 않았다. 몸 쓰는 일은 워낙 곤란한 그는 그 정도로 만족하기로 했다. 애초에 누가 소드 마스터를 찍을 것도 아니고.

 제대로 휘둘러 보는 일도 드문 검은 어두운 밤에도 새파랗게 빛이 서렸다. 검날에 비치는 제 얼굴의 반쪽을 비추어보던 그는 조금 더 날이 선 듯한 표정을 자세히 살폈다. 다른 점을 굳이 찾으려 해봐야 이 모습 또한 제 일부에 불과했다. 감당해야 할 것도 아니고 감내해야 할 것도 아닌, 그저 또 다른 방식으로 표현된 그.

 이제부터 그의 이름은 필리아다.

 

 

 필리아는 마법적 재능에 효율이 떨어지는 만큼 마력에 영향을 받는 것도 적어져 뱀파이어라면 으레 겪을 만한 흡혈 욕구도 그리 느끼지 않았다. 요컨대 마을에 내려가는 것이 그리 껄끄러워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로브를 깊게 두르고 있으면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았다. 이따금 시비가 붙기는 하더라도.

 “너 이 새끼 저번엔 잘도 날 엿먹였겠다?”

 “그 쪽이 누군데?”

 가끔 저렇게 알아서 문제를 일으키는 사람도 있고. 필리아는 주문했던 음료를 홀짝이며 자연스럽게 의자에 기대 앉았다. 여행자들이 모이는 여관 식당은 으레 크고 작은 소동이 있기 마련이었다. 많은 이의 주목을 다른 이가 가져갈 때 그는 상대적으로 덜 눈에 띄도록 움직일 수 있었다. 키가 크다는 것은 다른 때는 편하지만, 눈에 띄고 싶지 않을 때는 턱없이 불리한 조건이었다. 당연히 색다른 이벤트는 언제나 환영으로. 필리아는 들려오는 대화도 거의 무시한 채 주문한 음식을 때마침 다 비웠겠다 이대로 자리를 비우기로 마음 먹었다.

 “고작해야 애새끼 같은 게!”

 “누구더러 애새끼래, 키만 크면 다냐 이 새끼야!?”

 ……어쩐지 어조와 억양하며, 발작 버튼까지 익히 아는 누군가와 비슷한 목소리가 필리아를 붙들었다. 그러나 집에서 수십 킬로미터는 떨어진 이곳까지 그 가택경비원께서 왜 나오시겠는가. 착각일 것이다. 확인해볼 필요도 없지. 필리아는 덮어쓴 후드를 더욱 깊게 당기며 몸을 일으켰다. 최대한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게, 여관 출입구까지 걸음을 이끌었다. 손잡이를 잡는 순간까지 그는 안심했다. 문을 열고 나가려는 순간에, 정확히 그를 부르는 목소리가 화살처럼 날아와 꽂히지만 않았더라도.

 “거기, 당신.”

 “…….”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 필리아는 아주 잠깐만 고민했다가, 이내 피로함을 느꼈다. 근본은 어디 가지 않는 법이라. 그대로 무시하고 나가도 될 것을 괜히 멈칫했다. 어쨌거나 그는 이곳에 아는 사람이라고는 ‘아무도’ 없었으니. 문 손잡이에 힘을 싣는 것을 용케 알아차렸는지, 어느새 가까이 다가온 문제의 인물이 당겨야 열리는 문에 턱 손을 올려 짚는 것으로 가로막았다. 빌어먹을. 아까 싸우고 있던 건 대체 어떻게 된 거냐고. 필리아는 속으로 욕설을 내뱉으면서 턱 밑으로 다가오는 수풀의 냄새가 익숙하다는 판단은 여전히 보류 상태로 내버려두었다.

 “……저한테 뭔가, 문제라도 있습니까?”

 새삼 필리아는 자기 목소리가 생각보다 높게 나오고 있다는 것을 인지했다. 한 번도 듣지 못한 목소리라면, 어렵지 않게 속여 넘기기엔 충분하다고 여겨졌다. 후드에 가려져 잘 보이지는 않지만 상대도 트집잡을 구석이 없는지 한동안 대꾸가 없었다. 적당히 넘겼겠다 싶어 슬쩍 문을 당겨보았지만 망할 문짝도 도와주는 것 하나 없이 꼼짝도 하지 않았다. 저놈의 무식한 완력은 하여간.

 “일이 없으시면 좀 비켜주시―.”

 “내가 실은 어떤 머저리를 찾으러 왔거든.”

 ……그걸 왜 나한테 말하는 걸까. 라는 불만은 당연히 입 밖으로 낼 수 없었다. 분명 깐족거리고 있을 그 괘씸한 면상이 안 보이는 것은 다행이었다. 짜증으로 일렁이는 필리아의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도통 앞에서 비키지 않는 이는 집도 절도 없는 괘씸한 놈이 튀었다느니, 내가 저를 얼마나 생각하는지 모르고 배은망덕한 짓거리를 하고 있다든가, 누가 들으면 치정극으로 오해할까 두려울 소리를 잘도 지껄여댔다. 그러니까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냐고요. 싸늘하게 식은 눈으로 후드 아래에 어른 거리는 인영을 노려보는 것도 잠시.

 “사람이 얘기하는데 눈을 마주 보지 않는 것도 예의가 아니지 않아?”

 “모르는 사람하고 굳이.”

 “아는 지 모르는 지는 봐야 알지 않겠어? 비싼 얼굴 구경이나 시켜주지 그래.”

 하여간 억지 부리는 것에는 아주 도가 트셨다. 이 이상 눈에 띄는 실랑이를 만들어주고 싶지 않은 필리아는 적당히 원하는 대로 해주고 내쫓는 것이 더 나을 것 같다는 판단을 내렸다. 망할, 빌어먹을. 그는 스스로 결정을 내리고서도 내키지가 않아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면서 깊게 눌러쓰고 있던 후드를 한 번에 벗어 내렸다.

 “미안하지만, 수배범을 찾고 있는 거라면 딴 데서 하시죠.”

 “…….”

 갑자기 후드를 벗는 바람에 희게 반짝이는 머리카락이 사방으로 나부꼈다. 대충 손으로 휘적 머리칼을 넘겨 정돈한 필리아는 눈앞의 인물을 곧게 바라보았다. 아니길 바랐지만, 둘도 없이 그는 아퀼라였다. 또 다른 모습을 마주하고 있어도 별 다른 표정 변화가 없는 아퀼라의 얼굴은 필리아의 상상 그 어느 쪽도 아니었기에 오히려 혹하고 놀라는 쪽은 필리아 본인이었다. 자기 이름만큼이나 푸르게 빛나는 저 눈에 이쪽의 동요가 고스란히 비칠까 저어한 그는 재빠르게 고개를 돌렸다.

 “가는 길이 바빠서 그런데, 이제 좀 비켜주실래요?”

 “그래. 가세요 가.”

 마침내 아퀼라가 문에서 떨어져 나왔다. 비로소 목적을 달성한 필리아는 재빠르게 갑갑한 여관에서 빠져나갔다. 그 뒷모습을 같잖게 보면서도 잡지않는 것은 사냥감에게도 숨돌릴 틈은 있어야 하는 법이라.

 “웃긴 새끼.”

 아퀼라는 어수선한 여관 식당을 가로질러 아까까지 앉아있던 자리에 털썩 앉았다. 방금 시비 붙었던 놈에게서 빼앗은 시원한 벌꿀주가 든 잔을 손에 쥐고, 그는 방금 본 뻔뻔한 놈팽이의 얼굴을 다시 그렸다. 멍청한 것도 정도가 있지, 아니면 제 눈썰미를 얕보고 있던가. 어느쪽이든 아퀼라는 썩 유쾌하지 않았다. 똑같은 낯짝을 해가지고, 목소리가 좀 가늘어지고 키가 좀 더 커졌다고―저도 모르게 잔을 쥔 손에 더 힘을 실었다.―뭐? 가는 길이 바빠서 그런데 이제 좀 비켜주실래요? 모르는 사람? 저걸 그냥 콱.

 “별것도 아닌 걸로 유난 떨긴.”

 그래도 뭐, 어디서 청승 떨고 있는 걸 보는 것보다는 나은가. 아퀼라는 벅벅 머리를 긁었다. 대체 얼마나 대단한 사정이 있는지 이번에는 낱낱이 까주겠다는 일념으로 수소문 끝에 쫓아와보니 드러난 사실은 들인 품에 비해 형편없는데다가. 반반한 낯짝에 주먹을 갈기는 수준으로 끝내려니 그걸로도 모자를 판이었다. 몇 달은 집에 가둬서 고기만 줄창 자르게 부려먹을까. 아퀼라는 술이 반쯤 남은 잔을 휘휘 흔들었다.

 도망치는 사냥감이란, 다시 제발로 걸어 들어오게 하면 그만이지. 그는 그 방법을 몹시도 잘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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