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나를 무슨 색으로 보고 있을까 (22/4/5)
“남자아이라면 어때?”
깃털만큼 가벼운 목소리가 부드럽게 내려앉는다.
“귀엽겠죠.”
그건 비단 당신을 닮았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여자아이는?”
이번에는 어떤 대답을 해아 당신의 마음에 찰까.
“어느 쪽이든 저는 상관없어요.”
낳기로 한 건 비스잖아요. 간단하게 답한 내 말에 당신은 뭐가 그리 믿기지 않았는지 동그랗게 눈을 뜬다. 말갛게 내 품에서 빛나는 호수빛과 레몬빛의 눈동자를 들여다보며 덧붙여 말했다.
“게다가 이미 몇 번이나 물어보셨잖아요.”
꼭 같은 말을. 너는 남자아이가 더 좋은지, 여자아이가 더 좋은지. 아이에 대해서 워낙에 부정적인 말을 해왔으니 어지간히 신경이 쓰일 것이다. 그렇다고 성별이 정해지지도 않은 이맘때에 해본들 소용없는 말일텐데도.
“말해 봐요. 오늘은 또 누구한테 무슨 말을 들었나.”
“그으……뭐. 아무것도.”
“아무것도 아니면 비스는 아무 말도 안 할 사람인 거 제가 제일 잘 알아요.”
은근슬쩍 고개를 돌리려는 당신을 붙들고 가볍게 키스를 했다. 깜박거리는 당신의 눈은 어쩔 줄을 모르고 공중을 헤맸다. 얼른요. 조급하지 않게 조르듯 나는 당신의 입술을 쪼듯이 살짝 깨물었다. 아, 한 줄기 새어나오는 숨결이 무척이나 달콤해서.
“남자아이면……기가 세서 나이 어린 사람들이 첫 아이로 키우기 힘들 거라고 그랬어.”
“웃기지도 않는 개소리네. 그래서 여자아이는요?”
“여자아이는, 뭐라더라? 영악해서 자기 하고 싶은 대로 안 되면 휘두르려고 해서 못할 일이래.”
“뭐 그렇다 치고. 비스는 그럴 거 같아요? 저랑 비스의 아이가?”
같잖은 소리는 다 집어치우고. 당신의 생각이 괜한 불안으로 뻗치지 않도록 선택지를 대폭 잘라낸 질문을 던진다. 어떤 말이든 그 저의를 의심하지 못하는 당신은 그렁그렁한 눈을 몇 번인가 깜박이다가 이내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다.
그럴 거면서. 그러면 됐지. 사소한 불안에도 하나하나 확인을 받고 안정감을 되찾고 싶은 당신이 안타깝기도 하고 사랑스럽기도 한 그 가운데 어딘가에서. 나는 당신이 뱃속에 다른 생명을 품게 되었다는 두 달쯤 전의 그 날처럼 기어코 눈물 쏙 빠지게 울리고 싶기도 해서.
“아, 죽겠네.”
“뭐가?”
당신은 금세 불안함 대신 호기심을 가득 채운 눈으로 내 눈치를 살핀다. 그것 또한 정확하게 내 욕망을 부추기는 것을 모르고. 아슬아슬하게 충동을 내리누른 나는 눈에 보이는대로 하얀 목덜미에 입술을 묻는다. 예민한 당신이 급하게 숨을 들이키는 것에 맞춰 세차게 맥이 뛰는 그 자리에 슬며시 이를 박아넣는다.
“렌……! 아, 아직은…….”
“알고 있어요.”
분명 알고 있는데. 조금은 괜찮지 않을까. 끝까지만 안 하면 되지. 하지만 여기서 선을 그어야지. 머릿속에 온갖 상념이 휘몰아치다 언제 그랬냐는 듯이 순식간에 흩어졌다. 미련스러운 입술을 간신히 떼면 떠오르는 생각은 딱 하나 뿐이었다. 아, 못해먹을 짓이다.
“최대한 협조는 하겠지만, 이상증세가 조금이라도 나타나면 그 날로 끝이에요.”
“알았다니까.”
내가 아이를 싫어하건 아니건 그건 사실 문제도 아니었다. 임신과 출산은 인간이 할 수 있는 활동 중 가장 변칙적이고 예측할 수 없는 과정이었다. 차라리 알아서 사라진다면 더할 나위 없을 것 같지만 예상보다도 당신이 그것에 집착하고 부여하는 의미가 몹시도 컸다. 그러니 바란다면 둘 모두 안전한 것이 가장 최선이겠지만.
기우가 기우로 끝나야만 하겠지만.
“열심히 할게.”
“그러세요.”
당신은 나에게 고집이 세다고 불평을 늘어놓지만 내가 보기엔 당신 또한 그에 못지 않게 만만찮은 고집불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