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포칼립스 렌비스 일부 백업

 세상은 끝이 났다. 모두가 그렇게 말을 했다. 그럼에도 매일매일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었다. 이 우주에 살 곳이 여기만은 아니라며 떠나는 사람도 있었다. 떠나간 사람들은 새로운 곳에서 잘 적응하고 살아갈까. 망해간다는 별에 붙박혀 남은 사람들은 사라진 사람들을 시기하면서도 부러워했다. 그럼에도 하루하루 시간은 지나갔고 남은 사람들은 남은 사람들대로 어제와 같은 오늘을 보냈다. 그런 사람들 중에는 아르카비스 브리제펠트도 있었다. 딱히 애착이 남아 있어서는 아니었다. 다른 곳으로 떠나서도 똑같다면 떠날 이유가 없는 것에 가까웠다.

 그리고 아르카비스의 신체적 조건은 이 망해가는 세상에서 살아 남기에 어느 정도는 적합한 편이었다. 그를 구성하는 부품들이 낡아진다면 그 때는 또 고민해봐야 할 일이겠지만. 그러나 그가 알기로 신체를 구성하는 부품들의 내구연한은 충분히 남아있었고, 아직은 할 필요가 없는 걱정이었으며, 오늘도 햇빛은 어김없이 따뜻했다. 아침으로 먹을 메뉴를 고민하기에 좋은 시간대였다. 그는 기꺼이 평소 즐겨 가는 카페테리아를 찾았다. 그가 아는 한 통 소시지를 그릴에 눌은 맛이 나도록 맛있게 구워 주는 곳은 그 카페테리아가 유일했다.

 따끈한 스프 한 그릇과 신선한 양상추 샐러드, 갓 구운 팬 케이크 3장에 레몬과 허브가 섞인 버터 한 덩이. 거기에 그릴에 구운 통 소시지 2개와 서니 사이드 업으로 튀긴 달걀 프라이. 거기에 따뜻한 아메리카노까지. 아르카비스가 꾸준히 찾는 메뉴였다.

 그리고.

 “아직도 안 질렸어요?”

 기가 막힌다는 얼굴로 뚱하게 쳐다보는 변함없는 이 가게의 유일한 사장 겸 직원까지. 그는 아무도 없는 가게 안에서 아르카비스를 맞는 둥 마는 둥했다. 그 표정만큼이나 마뜩찮은 목소리로 대뜸 한다는 소리가 저것이다. 손님을 받기 귀찮아 하는 기색이 역력함에도 아르카비스는 아랑곳하지 않고 앉던 자리에 털썩 앉았다. 따로 4인용 테이블도 4개는 되었지만 그는 항상 주방과 맞닿은 바 테이블 3번째 자리를 선호했다. 그 자리에서는 그 사장 겸 직원이 앉은 사람을 등지고 서서 숯을 채운 그릴에 기름기 넘치는 소시지를 약간 그슬려가며 굽는 것을 잘 볼 수 있었다. 그 향긋한 냄새도 가득 맡을 수 있었고. 나름대로 효율적인 전략이었다.

 “아침 메뉴 여기만 하는 것도 아니잖아요.”

 “돈을 주고 오는 손님을 내쫓는 건 여기뿐이지.”

 “이 시간대에 오는 사람은 당신뿐이라구요! 제가 이 이른 시간부터 나와서 일을 해야겠어요?!”

 “그러면 네가 소시지를 맛없게 굽든가.”

 렌, 하고 아르카비스가 카운터 앞에서 파르륵 떠는 사람의 이름을 짤막하게 불렀다. 이름을 불린 그는 하아, 하고 삐딱하게 고개를 치켜든 채로 한숨을 푹 쉬었다. 그대로 걸어놓았던 앞치마를 보지도 않고 휙 집어들고는 순순히 허리에 둘렀다. 검은 앞치마 윗단에는 회색조의 실로 수려하게 직접 놓은 수가 놓여 있었다. 에쉬레스토 발더가르트. 그의 이름이.

 “그래서. 뭐 드실 건데요.”

 “귀찮아서 아침 메뉴는 단일 메뉴로만 팔겠다면서.”

 “아오 진짜.”

 뒷머리를 벅벅 긁으면서 에쉬레스토는 커피 머신부터 켰다. 음악조차 틀지 않아 조용한 가게 안이 금세 물이 끓는 소리로 가득 찼다.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흐름으로 그는 냉장고를 벌컥 열어 안에서 미리 따로 담아놓았던 야채 통과 팬 케이크 반죽이 담긴 볼을 꺼내 와서는 쾅 조리대 위에 내려놓았다. 살살 놔, 시끄러워. 남일인 양 아르카비스는 지나가는 어조로 말했다. 들은 체도 안 하고 에쉬레스토는 양상추를 한 움큼 끄집어내 착착착 채썰었다. 물을 채운 그릇에 도로 푹 담가버린 뒤에 이번에는 프라이팬을 꺼내 팬 케이크를 구울 준비를 했다. 3개의 화구 중 한 화구에는 이미 뚜껑 덮인 냄비 하나가 있었다. 그 옆에 팬을 내려놓고 불을 지피는 에쉬레스토의 뒷모습을 아르카비스는 조용히 눈으로만 쫓았다.

 “오늘 스프는 뭐야?”

 “양송이 버섯이 기한 촉박하길래 그거 다 뜯어서 넣었어요.”

 나는 무슨 잔반처리기인가, 아르카비스는 별 말은 하지 않고 다만 그런 생각만 했다. 사실상 모든 물자가 귀해진 상황에서 사용기한같은 것은 별 의미가 없어지기는 했다. 그럼에도 모든 것은 재해 이전처럼 규칙적으로 이루어졌다. 그러지 않으면 더 멸망이 가속화 될 것처럼. 그저 모두가 필사적으로 예전의 생활을 지키려 노력했다. 의미가 없는 것조차. 그래서 여전히 모든 물건에는 안전 라벨이 붙었고, 이전과 똑같이 사용 기한 날짜가 적혀 나왔다.

 

 

 뉘엿뉘엿 저물어가는 창밖의 노을을 바라보며 아르카비스는 소파 위에 웅크려 앉아있었다. 저 너머에 보이는 산의 이름이나, 곳곳에 들쭉날쭉 지어진 낮은 건물의 상가라든가 하는 것이 겨우 눈에 익어가는 낯선 작은 도시의 풍경을 눈에 담으면서. 날이 추워질수록 해는 점점 짧아졌다. 이미 알고 있는 사실임에도 그는 그것이 영 생경하게 다가왔다. 주변 변화를 민감하게 인지하고 지각하는 신체와 별도로 심리적인 부분은 종종 그것을 따라잡지 못하고 길을 잃었다. 분명하게 현실을 인식하면서도 어쩐지 두어 시간은 동떨어져서 바라보는 기분이었다. 당연하게도, 그런 것은 불가능했다. 아르카비스는 단지 오랫동안 방치해 녹슬었던 기능들이 지나치게 빠르게 작동하는 탓에 느끼는 일종의 적응기에 불과하다고 단정지었다.

 ……그런 건 그렇다 치고. 벌써 이런 시간이 되면 안 되는데.

 겨울의 일몰은 빠른 편이었으므로 아직 시간은 남아있었다. 그러나 아르카비스는 초조해지는 스스로를 어떻게 하면 좋을지 여전히 짐작도 하지 못했다. 지금까지의 기록으로 따지면 그의 룸메이트가 평균적으로 귀가하는 시간은 오후 7시 즈음이었다. 벽에 걸린 시계가 가리키는 지금 시간은 고작 오후 5시. 그러니까 조금 더 있으면 올 텐데. 알고 지낸 지 반년이 지나도록 아르카비스는 아직도 그를 어떤 얼굴로 마주해야 할 지 자신이 없었다. 필요최저한으로 딱딱 맞추어 놓은 가구들 사이 비어 있는 공간마다 스며든 한기가 그마저 얼릴 것 같이 느껴졌다.

 아르카비스에게는 아직까지도 변함없이 기다리는 사람이 있었다.

 그러나 그 사람이 누구인지도 잊어버려서야 의미가 없는 시간을 보냈는지도 모른다. 으슬으슬하게 몸을 떨게 하는 한기에 아르카비스는 목덜미를 덮는 옷깃을 잡아 끌었다. 간이 프로파일을 띄워 검사해 본 체온 유지 시스템에는 어떠한 오류도 없었다. 모든 것이 정상적으로 흐르는 지금에도 그는 제가 정상이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지금 느끼는 감정 또한. 아르카비스는 몸을 더 작게 웅크려 세워놓은 무릎 위로 얼굴을 푹 묻었다.

 기다릴 수 있다고, 했던 것 같은데.

 잠깐사이에 해는 온전히 저버리고 어스름한 것만이 남았다. 끝내 오늘도 그렇게 날이 지고 있었다. 텅 비어가는 것 같은 하늘을 좁은 틈새로 보며 아르카비스는 또 다시 막막함을 느꼈다. 그것이 예전의 막연한 것과 비슷하다는 생각에 미치자 그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래서는 안 됐다. 그럴 수는 없었다. 저도 모르게 벌떡 일어나 차가운 바닥에 발을 디뎠을 때 때마침 아르카비스를 가로막듯이 현관 문이 벌컥 열렸다. 날카롭게 그 방향을 쏘아보면 마찬가지로 놀란 듯한 그의 룸메이트, 에쉬레스토가 서 있었다.

 “우와. 뭐에요? 저 마중 나와주려고? 일이 생각보다 일찍 끝나서 놀래켜 주려고 그냥 왔었는데.”

 “…….”

 “아니면 지금 어디 가려는 거 아니죠? 바깥에 정말 추워요.”

 여기 안도 더럽게 춥네. 같은 시덥잖은 소리를 하며 에쉬레스토는 부산하게 움직이며 보일러를 켰다. 추위는커녕 더위도 잘 알지 못하는 아르카비스는 뻣뻣하게 한 자리에 굳은 채로 에쉬레스토가 이동하는 자리만 눈으로 따라가 바라볼 뿐이었다. 실내 곳곳에 열이 돌도록 온도 조절을 한 에쉬레스토는 곧 오면서 사온 것들을 아르카비스의 눈앞에 놓인 널찍한 테이블 위에 부려놓고는 곳곳에 정리해 넣기 시작했다.

 태생적으로 기계에 지나지 않는 아르카비스에게는 필요를 느낀 적 없는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때로는 무엇에 쓰는지 관심조차 없는 것도 있었으므로 이 집의 수납 공간은 거의 다 에쉬레스토가 꾸려가야 하는 몫이었다. 한 번도 그는 그 역할에 불만을 내비친 적이 없었지만 아르카비스는 어쩐지 이대로 있으면 안 될 것 같다고 느꼈다. 거들어줘야 할까. 홀로 집에 남아있는 시간동안 어느 분류의 물건을 어디에 두는지 그 규칙을 어렴풋이 알아본 그는 어정쩡하게 서 있던 몸을 끌고 플라스틱 병들을 주르륵 나열하는 에쉬레스토의 곁으로 다가갔다.

 “왜요, 심심해요? 이거만 정리하면 끝나니까 잠깐만 기다려 줄래요?”

 “……아니. 도와줄 게 있을까 해서.”

 “도와주시면 고맙지만.”

 어디다 둬야 하는지는 알아요? 세탁세제니 뭐니 하는 것들을 한 품에 안은 에쉬레스토가 한 마디 던지며 세탁실로 향했다. 아르카비스는 남아있는 것들로 눈을 향했다. 노란 병은 식기세척제일테고 하얀 병은……주방 청소 세제인가. 두 가지 다 아마도 싱크대 쪽 서랍에 넣어두는 곳이 있었다. 어렵지 않게 예전 기록을 따라 서랍을 열면 딱 들고 있는 것이 들어갈 만큼 비어 있는 공간이 있었다.

 에쉬레스토는 물건들마다 놓아두어야 할 곳을 딱딱 정해 놓는 것을 선호했다. 하긴 그러는 편이 찾기 더 좋을 것이다. 그에게는 모든 물건에게 다 제자리를 만들어주는 재주가 있었다. 빈 공간도 거의 없이 딱딱 정렬되어 있는 배치를 보고, 아르카비스는 자기 또한 이처럼 에쉬레스토의 공간 어딘가에는 위치하고 있을까 가늠해보려 했다. 그러나 어떤 뛰어난 성능의 컴퓨팅 모듈을 갖춘 기계이든 입력할 만한 정보 없이 제대로 된 결과를 도출할 수는 없는 법이었다.

 그러다 보면 아르카비스 브리제펠트는 여전히 에쉬레스토 발더가르트에 대해 제대로 아는 건 하나도 없는 스스로를 보았다.

 “비스.”

 “……아, 벌써 다 끝났어?”

 갑작스레 뒤에서 습기 어린 흙냄새를 품고 다가온 무게감에 아르카비스는 움찔 떨었다. 그는 에쉬레스토가 어떻게 그렇게 선뜻 다가올 수 있는지 항상 놀라울 따름이었다. 이만큼이나 가까워지기에 아직 그들은 서로 안 지 얼마 안 되었다는 생각만 들었다. 실제로 그가 에쉬레스토에 대해 모르는 것만큼이나 에쉬레스토도 그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하지 않나. 게다가 고작 몇 달 전만 해도 서로 이해가 맞지 않아 자주 냉전을 일으키기도 했었다. 일전에 사고나 다름없던 그 일이 생기지만 않았더라면 여전히 서로 데면데면하게 지나쳤을 것이라고 아르카비스는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렇다 한들 지금의 평화가 영 어색한가 하면 그렇지도 않았다. 응당 이렇게 되었어야 하는 것처럼.

 “——…….”

 “미안, 방금 뭐라고?”

 딴생각을 하는 사이에 에쉬레스토가 뭐라고 한 것 같았다. 아르카비스는 즉시 사과의 말을 하며 다시 들으려 했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그를 끌어안은 팔이 풀리는 것도 아니었다. 아르카비스는 열어놓은 서랍을 닫고 둘 곳을 찾지 못한 손을 어정쩡하게 허공에 들어올린 채로 가지런하게 그릇들이 정리되어 있는 찬장을 들여다보는 척했다. 뒤에서 내리누르는 무게만큼 무겁게 내려앉는 적막함은 무언가라도 해야 할 것 같은 강박을 느끼게 했다. 어쩌면 못 들었나보다, 그런 생각으로 아르카비스가 다시 입을 떼려던 찰나에 에쉬레스토의 목소리가 다시금 목덜미를 간지럽히며 귓가로 스며들었다.

 “별 일 없었어요?”

 “집에만 있었으니까, 아무래도.”

 생각보다 싱거운 말에 아르카비스는 이번에는 선선히 대답을 내놓았다. 허리를 둘러 여전히 꾹 감싸고 있는 팔 위로 손을 내리면 슬그머니 온기가 멀어져갔다. 손 안에서 빠져나가는 흐름을 따라 뒤돌아보면 언제 가까이 다가온 듯이 훌쩍 멀어져서는 다시 자기가 할 일에 골몰하는 에쉬레스토가 보였다. 내가 뭔가 또 잘못했나, 아르카비스의 머리에 뒤늦게 그런 생각이 스쳤지만 아무래도 뭔가 말을 꺼내기에는 너무 늦은 타이밍 같아 보였다. 마땅히 할 말도 할 일도 찾아내지 못한 그는 얌전히 모든 짐이 정리되어 비워진 테이블 맞은편 소파 자리에 다시 앉았다. 아까 전까지 앉아 있던 까닭에 데워진 자리는 여전히 온기가 남아있었다.

 그 자리에 앉아, 아르카비스는 에쉬레스토의 옆모습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떨어져 있는 만큼의 거리감을 곱씹으면서.

 에쉬레스토가 아르카비스를 이 집에 데려다 놓기는 했지만, 그는 딱히 아르카비스에게 무언가를 더 바라는 행동은 하지 않았다. 그럴 생각으로 데려온 것이 아니라고 말은 되어 있었지만 아르카비스는 나름대로 각오도 끝마친 지 오래였다. 사실 그 말을 믿지 않았다는 쪽에 더 가까웠지만.

 세상에는 사람이 사람을 사는 것보다 기계를 들이는 것이 더 합리적이라 생각하는 부류도 없지 않았다. 아르카비스라고 에쉬레스토 또한 그런 사상을 가진 사람이라 생각하고 싶은 것은 아니었다. 다만 그렇게 된다 한들 어쩔 수 없다고 여길 생각이었다. 말마따나 그 고생을 해가며 고쳐준 것은 사실이었으니까. 게다가 그 구조 행위는 아르카비스의 괜한 고집으로 인해 질질 시간을 끈 것도 있었다. 결국에는 이렇게 될 것을, 왜 그 자리를 벗어나지 않겠다고 억지를 썼더라. 이제 아르카비스는 제 과거까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 때 그렇게 애를 썼던 에쉬레스토만큼이나.

 말로 표현되지 않는 어떠한 마음은 가만히 같은 자리에 머무르기만 할 뿐이었다.

 거창하게 룸메이트라 이름 붙이기는 했지만 실상 그들은 한 주에 이틀 정도 얼굴을 보는 사이였다. 정확하게는 갈 곳이 없는 아르카비스에게 에쉬레스토가 가지고 있는 집 중에 한 채의 열쇠를 주었을 뿐이었다. 물려 받은 곳 중에서 저택으로 쓰는 본채 말고도 창고로 쓸 수도 있는 별채도 여럿 딸린 가장 쓸데없이 큰 규모의 집이라고 했다. 너무 커서 혼자서는 절대 관리가 안될 정도지만 대신에 커다란 중장비를 처넣어도 되어서 편하다나 뭐라나.

 그 중장비 중에는 아르카비스를 복원하는 용도로 유용하게 써먹은 것도 있는 모양이었다. 도심에서 떨어져 있는 탓에 엔간한 일을 벌여도 이목을 끌지 않는 커다란 집을 만난 지 얼마 안 된 사이에 대뜸 넘겨받게 생긴 아르카비스는 물론 처음에는 강경하게 거절했다. 그랬더니, 뭐라고 했더라.

 ‘당신 고치려고 들어간 부품 수리비는 이제 박물관에서 역사 사료로 쓰겠다고 당신을 팔라고 해도 그 돈으로 못 갚아요. 그 집 관리하는 일을 줄테니 그걸로 갚으라는 뜻이지 다른 거 없어요.’

 부탁한 적도 없는 일을 멋대로 해치워 놓고 그걸 멋대로 빚으로 달아서 비용을 돌려내라는 엄청난 소리를 해댔지. 아르카비스가 어처구니없이 에쉬레스토를 쳐다보았을 때 그는 당연하다는 듯이 갈 곳도 없으면서 설마 그 허름한 곳으로 다시 돌아가겠다는 건 아니겠죠? 라는 소리를 덧붙였다. 그즈음에 이르러서는 과연 아르카비스도 할 말이 없어졌다.

 ‘어차피 기다리는 사람 누군지도 기억 안 난다면서요.’

 기억나지 않는다 해서 그 자리를 함부로 벗어나도 괜찮았던 걸까. 이제 와 뒤늦은 생각이었지만 아르카비스는 여전히 한줄기 미련을 떨치지 못했다. 달력은 그가 마지막으로 기억하는 날짜에서 백 년은 족히 지난 날짜를 가리켰다. 그러니 아마도, 누구든 할 만큼 했다고 해줄지도 몰랐다. 적어도 에쉬레스토라면. 궁상맞은 짓거리 좀 작작하라고 할지도 모르지. 아르카비스는 그의 길고 긴 인생에 막 끼어들었을 뿐인 제멋대로인 사람이 잘 알지도 못하면서 내뱉는 막말에 이상할 정도로 위안을 얻고 있음을 새삼 깨달았다.

 그러니까, 에쉬레스토 발더가르트는 ‘그’ 가 아닌데도.

 아르카비스는 언젠가 보았던 세계 지도를 떠올렸다. 어쩌면 이 넓은 세상 어느 한 구석에는 ‘그’ 의 흔적이 남아있을지도. 아니면 이토록 넓은 땅 위에 어디에도 이제는 ‘그’ 의 존재를 입증할 증거는 더 이상 남아있지 않을지도. 아니라 확신할 근거도, 맞다고 결정지을 근거 또한 마땅히 없었다. 그런 주제에 생판 모르는 남이 끌고가는 대로 끌려와 버린 건 또 무슨 일인가. 그는 에쉬레스토와 관련된 것에 대해서는 다소 충동적으로 결정한 것도 없잖아 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니까 그 때는 정말 어딘가 아팠던 게 틀림없었다. 아팠으니까, 대충 생각하고 넘기고…….

 ‘아프면 아프다고 말을 해야 할 거 아니에요!’

 누군가가 버럭 소리지르는 목소리가 불현듯 아르카비스의 머릿속을 울렸다. 그 음색은 어딘가 에쉬레스토의 것과 닮았다. 닮았지만, 그는 한 번도 아르카비스에게 그런 말을 하며 소리지른 적은 없었다. 아, 이거 또 그거군. 아르카비스는 그 차이를 깨닫자마자 어렴풋하게 자기 상태를 짐작할 수 있었다. 의식이라 불릴 OS 시스템에서 로그오프 되어 셧다운 상태가 되었을 때 재기동 하면서 간혹 발생하는 문제였다. OS는 완전히 활성화되어 있지만 표면의 일시 가동 중지 상태인 유기 장치 드라이버와 접속 딜레이가 생겨버리면 늘어지는 속도만큼 버그가 생겼다. 이 현상은 그 버그의 부산물이었다.

 이를테면, 꿈이라고 부를 수도 있었다. 단지 아르카비스가 보는 것은 검색자가 오류를 일으켜 참조해야 할 곳을 벗어나 이전 로그 데이터 중에 무작위로 특정 패턴과 반응해 잘못된 주소의 기록을 참조해 오는 것에 불과했다. 왜 하필이면 더 심층 부분의, 의식적으로는 접근 허용조차 되지 않는 망가진 메모리에서 불러오는 것인지는 더 알 수 없었다.

 아르카비스의 낡은 부품을 교체 수리하면서 에쉬레스토는 그런 말을 했었다.

 ‘저장된 기록은 최대한 그대로 이식했지만 아마 다시 꺼내 볼 수는 없을 것 같아요. 인덱스까지 죄다 깨졌어요.’

 구식 부품 탓이었는지 하도 되풀이해서 본 탓이었는지. 어느 쪽이든 에쉬레스토가 이른 그대로 아르카비스는 새 기억 장치 속에서 해당 기록의 존재는 인식할 수 있었지만 자율적으로 다시 꺼내 보는 것은 할 수 없었다. 어떤 식으로 접근하려 해도 해당 주소에는 인식되는 데이터가 없다는 없다는 경고와 함께 튕겨 나올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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