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둥새] 이름의 의미 + 첫 만남

 필라스. 그것을 이름으로 받은 까닭은 이전 그 이름을 쓰던 이가 ‘자리를 비웠기’ 때문이다. 보편적으로 장생종에 속하는 뱀파이어들 또한 다른 장생종 못지않게 세대교체가 느렸다. 예기치 않는 세대교체가 이루어지는 이유란 대개 세 가지였다. 피에 취해서 돌아버렸다거나, 시비에 휘말려 퇴치되었다거나. 드물게는 스스로 죽는 경우가 그렇다. 먼저 필라스의 이름을 가졌던 자가 처한 상황은 세 번째였다. 그리고 때마침 교육 기간이 끝난 신생 뱀파이어가 이름을 이어받았다. 그들 일족은 으레 그런 식으로 개체 수를 조절했다.

 필라스. 떠받치는 자. 이 이름을 받은 자는 일족을 해치려는 것들을 제거하는 것이 사명이었다.

 라고 고상하게 떠받치는 시늉을 하며 아무리 감춘다 한들, 그것이 일족의 뒤치닥거리를 하는 잡역부에 불과하다는 것은 본인이 가장 잘 알고 있었다. 이름과 함께 부여받는 사명을 귀히 알아달라 하는 것도 퍽 우스운 꼴이었으나 밑바닥만 보고 사는 것도 썩 유쾌한 일은 아닌지라. 필라스는 그의 전임자가 ‘왜’ 자리를 비웠는가 같은 의문은 오래지 않아 스스로 깨달을 수 있었다. 남은 것은 ‘어떻게’ 비울 수 있었는가 하나뿐이었다.

‘독수리Vulture’ 가 허공을 날 때는 지상에 있는 ‘감시견Watchdog’ 이 한 차례 짖은 후였다. 일족에게 독수리는 하나여도 충분하지만 감시견은 많을수록 좋았다. 스물, 혹은 그 이상. 누가 알겠는가. 과묵함은 편리한 처세술이자 하나의 미덕이었다. 그저 개들은 공동체의 일원에게도 썩 친절하지 않았고, 개들이 짖은 날에는, 그 날 밤 누군가는 흔적도 남기지 못하고 사라질 뿐이다.

 그럼. 독수리는 개들이 사냥한 사체를 먹지. 그리고 어느 날 문득, 독수리들은 자기의 식욕에도 넌더리가 나곤 하는 것이다…….

 필라스는 제 이름값을 잊은 적은 없었다. 그저 다만 오늘도 어딘가에서는 독수리가 날아오르겠거니 하는 떫은 생각만 곱씹을 뿐이다. 일족을 등지고 탈출한 것도 벌써 예전 일이고, 그 때 이미 그의 나이도 갓 100살에 이른 해였다. 어디까지나 세상에 발붙이고 살게 한 만큼의 대가였을 뿐. 그마저도 너무 길었던 것 같지만. 그는 지금 생활에도 그리 불편함을 느끼지 못했다. 따분한 화려함보다 적당히 모자른 안락함이 있는 작은 집. 이따금 비가 새는 곳을 수리해주어야 하는 지붕 밑에는 필요 최저한의 가재도구들이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었다.

 벽난로에 불이 어느새 잔불만 남은 채로 꺼져가고 있었다. 줄어든 불길만큼 늘어난 서늘한 공기를 가로지른 필라스가 바싹 마른 장작을 몇 개 던져 넣었다. 새 먹이를 받아든 불이 금세 타닥타닥 타오르며 커다란 입을 날름거렸다. 불온하게도 그의 긴 은발까지 탐할 듯 불꽃이 너울거렸지만 필라스는 그리 개의치 않았다. 어느 정도 공기가 데워질 즈음 자리로 돌아온 그는 슬슬 다가오는 겨울을 대비하기 위한 예산을 적당히 그렸다. 그의 식량이기도 한 동물들이 지금은 너른 벌판에 있어도 곧 추위를 피할 수 있는 헛간에 몰아넣어야 하는데다, 그에 필요한 장작들과, 건초 더미에……. 나날이 느끼는 것이지만 무언가를 꾸려간다는 것은 매우 넉넉한 자본을 필요로 했다. 테이블에 던져둔 금화 주머니에서 금화를 하나씩 꺼내 탑을 쌓던 필라스는 이내 주머니에 짤랑거리는 남은 동전이 얼마 남지 않는 것을 목격했다. 늦기 전에 결심을 해야 했다.

 “얼마 전에 새끼 친 게 몇 쌍 있었지.”

 그렇다면 숫놈 몇 놈은 시장에 내다 팔아버려도 될 것 같다. 아직 쌓아둔 달걀과 그가 절대 직접 입에 대지 않는 우유도 몇 통은 있었으니 분명 제법 돈이 될 것이다. 평소 대금으로 받던 금액으로 꼽아보던 필라스는 이내 표시 하나 없이 금화를 주머니 속으로 한데 우르르 쏟아버렸다. 만사 귀찮은 그가 겨울에는 예산을 생각하는 까닭이 있었다. 아, 우습게도. 뱀파이어는 적어도 동사로 죽지는 않는다. 단지 ‘죽을 만큼’ 추워서 따스한 게 필요할 뿐이지. 그 뜻깊은 지식을 고작 귀찮다는 이유로 직접 몸으로 깨달아 버렸다. 대가는 한동안 무덤이 필요 없을 것 같은 쥐죽은 동면이었다. 겨울이란 것은 유독 까탈스러운 계절이 아닐 수 없었다. 그 이후로 그는 겨울에 대한 대비는 나름대로 철저히 했다.

 누군가와 부대끼고 사는 건 더 이상 사절이던, 이제는 몹시도 옛날 일이 된 그 때에. 속하던 가문 품을 벗어나서는 갈 곳도 부르는 곳도 없는 필라스가 몇 번의 겨울을 넘어가면서 겨우 자리 잡은 곳이 이곳이었다. 누구 하나도 찾아올 수 없게 경사 심한 산맥의 한 중턱. 누군가가 버리고 간 듯한 성한 곳 없는 오두막이라도 발견한 순간에는 얼마나 안심했던가. 바람이 새어들고 비가 스미는 곳들을 한 곳씩 손봐가면서 일차적인 목적은 달성해내자 이제 다른 것들이 눈에 띄기 시작했다. 보편적으로 무리지어 살다가 혼자 살면 으레 발생할 일들. 이를테면 생필품 조달이 그랬다. 정말 아무것도 없는 허허벌판이라면 모든 것을 스스로 해결해야 했으니. 그는 정말 누가 봐도 처절하고 쓸데없이 오래도록 자기의 선택이 최선이었는지 심사숙고했다. 아, 그렇다고는 해도 정말로 누구하고든 연을 맺고 이어지는 인생을 사는 것은 싫었다. 그러하니 결론은 애초에 정해진 셈이다.

 산다는 것은 퍽 번거로운 일이긴 했다. 그러나 제대로 죽는 것도 쉽지 않았다. 죽지 못해서라도 살기로 한 이상 돈이라는 것은 필수불가결의 요소였으며, 그것은 제대로 살려는 의지가 거의 희박한 필라스에게 거의 유일한 행동 자극 요소였다. 그럼 이제 돈이 될 일이 무엇이 있는가? 평생을 다른 생명을 죽인 만큼 생을 보장받은 이가 아는 사람 하나 없는 곳에서 빈손으로 시작할 수 있는 일을 해보려니 할 수 있는 일의 범주 자체가 몹시도 협소했다. 그나마 해 볼 만한 것은 다른 이에게도 수요가 있을 법한 것들―대체로 먹을 것들―을 내다파는 것이 낫겠다는 결론조차 정해지기까지 몇 달은 걸렸다. 그 해는 유독 추운데다 쉬이 뭉쳐 얼어붙는 눈이 여간 쌓이는 게 아니었다. 그 무게가 지붕을 위태롭게 내리 눌러서는 어지간한 일이면 눈썹도 까딱하지 않는 필라스의 근심이 단단히 되어주었다.

 다시 돌아오는 봄에, 기대도 하지 않았지만 땅에 뿌리를 박고 자라는 것들을 키우는 과정은 필라스에게 조금도 맞지 않았다. 남들처럼 모종 몇 가지 사다가 심어놓고서. 비가 오면 비가 오는 대로, 좀 마른다 싶으면 대충 물이나 뿌려주고. 파릇한 싹이 줄기를 내어 좀 자란다 싶으면 어김없이 잎이 누렇게 변하면서 죽어갔다. 그의 밭에서 제일 잘 자란 것은 잡초였을 것이다.

 지지부진하게 몇 계절을 헛수고로 보낸 뒤에, 한동안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거의 들개처럼 산 속을 헤매고 다니는 것뿐이었다. 들짐승 수십 마리를 잡아 족친 끝에 필라스는 이것들을 일일이 찾아다닐 수고를 덜 방법을 찾았다. 그리하여 그는 밭이랍시고 대충 갈아놓은 땅 주변에 울타리를 세웠다. 통나무를 대충 쌓아둔 듯한, 미적 감각이라고는 보이지 않는 그 작품은 그럼에도 목적에는 충실했으니 퍽 다행이었다.

 그다지 넓지 않은 공간으로 인해 처음에 필라스는 토끼같은 작은 동물들을 가두어 모아두었다. 널린 게 풀이었으니 먹이는 모자르지 않았으나……유감스럽게도 그 해의 겨울 추위를 피하기 위해 자기들끼리 한데 모여 온기를 나누다 그만 단체로 동사하고 말았다. 겨우내 축사를 세우면서 그가 ‘내가 먹을 것들을 위한 집도 지어야 한다고?’ 라고 스무날 가량은 투덜거렸음은 말할 것도 없었다.

 그 숱한 경험들을 통해 필라스가 얻은 것은 해야 할 일은 생각날 때 하는 게 이롭다는 점 한 가지였다. 그는 내키지 않는 걸음을 이끌어 축사로 쓰는 헛간에 다다랐다. 팔 만한 가축들을 추려내어 한쪽에 잘 몰아놓은 그는 꽤 손에 쥐어질 금화가 당장 손 안에 있는 양 만족스럽게 떠났다.

 당장 무슨 일이 벌어질지 꿈에도 모른 채로.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다음 날 아침 동물들의 수가 명백하게 세어둔 것과 확연히 달랐다. 그것도 줄어든 쪽으로. 게다가 그저 평범한 좀도둑은 아닐 것 같은 것이, 제법 큰 축에 속하는 사슴도 둘은 없어진데다 축사 안에는 특이한 피냄새도 남아있었다. 동물의 피가 아닌 다른 어떤 무언가, 인 건 확실한데. 도통 기억나지 않는 것을 보면 접하지 않은 지 꽤 오래된 듯 했다. 필라스는 우선 별 수 없이 잡아두었던 예산 금액을 조정했다. 다행히도 필요 금액부터 최저한으로 잡았으므로 크게 비는 일은 없었으나…….

 “어떤 새끼가.”

 필라스는 평생을 처형자로 살았다. 그 경력이 어디 가는 것은 아니어서, 그는 지금 자기의 영역이 침범당한 것이 영 거북했다. 눈앞에 보일 듯 보이지 않는 벌레가 그늘을 틈타 돌아다니는 듯한. 당장은 별 수 없으니 그는 일단 어떤 정보값도 없는 피냄새나마 기억해두기로 했다.

 불청객 하나가 끼었어도 필라스의 일상은 바뀔 것이 없었다. 얼굴 반은 가릴 정도로 깊게 둘러 쓸 수 있는 후드가 달린 로브를 뒤집어쓰고서, 팔아치울 물건들을 말 한 마리로 끄는 수레에 옮겨 싣고, 적당히 흥정해서 팔아 치우는 일 또한. 그가 주로 상대하는 사람들 역시 장사에는 이골이 난 족속들이었다. 이 일을 시작한지 얼마 안 되던 시절의 필라스는 자기가 상당히 밑지는 일을 하고 있다는 것도 알지 못했다. 제대로 경제 사회가 돌아가는 것을 자연히 배울 때조차 놓친데다 금전 감각 또한 그리 좋지 않았던 탓이다. 보다 못한 사람들이 사정을 알려주고 나서 필라스는 약간 자제력을 느슨하게 풀었다. 뭔가 엄청난 짓을 한 건 아니고, 정당하게 가졌어야 했을 몫만 빼돌렸다는 소리다. 먼지 한 톨 남지 않게 털어먹는 방법을 모르는 것도 아니지만 눈에 띌 짓을 할 필요는 없었다. 그러니 필라스는 귀찮지 않을 만큼, 그렇다고 너무 손해는 안 보도록 셈을 하는 법을 시행착오를 겪어가며 익히게 되었다.

 첫째로 처음 제시하는 가격은 무조건 받을 거라 예상할 수 있는 가격의 1.5배. 그런 다음에는 시뻘게진 상대의 안색을 살피며 당초 목표했던 가격까지 적절한 말장난을 섞어가며 낮춘다. 필라스는 본인이 생각하기에도 말주변이 좋다고는 못할 것 같았다. 그러나 또 후드로 얼굴을 반쯤 가린 행색을 하고 주기적으로 시장에 나타나는 것은 굉장한 호기심을 이끌어내는지, 그는 이번에도 후드 한 번만 벗어주면 처음 제시한 가격의 2배를 내주겠다는 소리를 들었다. 라고 해봐야 애당초 보통과 비교해서 확연히 차이가 나는 자기 피부색을 숨기기 위함이었으니 필라스는 굳이 모험할 까닭을 느끼지 못했다. 그는 결국 목표했던 금액에 얼추 맞는 금화를 손에 쥘 수 있었다. 당연하다시피 한 결과에 뿌듯해할 이유도 찾지 못하고, 슬슬 지쳐가는 몸을 집으로 싣고 갈 수레를 찾으러 가는 순간에.

 “아…….”

 “이거 실례―.”

 필라스에게는 어깨에 닿을까 말까 한 누군가가 미끄러지듯 다가와 부딪쳤다. 그리고는 순식간에 반대편으로 향하는 게 아닌가. 필라스는 처음에는 소매치기인가 하고 주머니를 확인했다. 그러나 잡히는 금화의 개수에는 차이가 없었고. 그 다음으로는……어딘가 익숙한 냄새가 코끝에 맴돌았다. 기실 평범할 뿐인 피냄새. 그러나 그의 재산을 노리는 좀도둑의 냄새가 난다면 달라지는, 반드시 놓쳐선 안 되는 흔적.

 저걸 죽여 살려. 필라스의 마음속에 순식간에 험악한 결말이 수십 가지 떠올랐다. 그렇게 씹어 먹을 것처럼 노려보아도 그의 어깨를 치고 지나간 문제의 인물은 순식간에 인파 속으로 미끄러져 흘러들었다. 기가 막힐 정도로, 아무리 사람들을 밀쳐내듯 헤치고 뛰어가보아도 따라잡을 수가 없었다. 다 잡은 물고기를 놓친 심정으로, 필라스는 분하게 주먹을 움켜잡았다. 아니, 다른 방법도 얼마든지 있었다. 이를테면, 한 번 저질러본 적 있는 일은 두 번째는 더 쉽다고 하는 말. 필라스는 후드 아래로 부릅 뜬 눈을 흉흉하게 빛내며 텅 빈 수레마차에 털썩 올랐다. 오늘 밤은 제법 바쁠 것 같았다.

 

 

 필라스가 딱히 함정을 파놨다던가 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는 오늘 밤에도 뻔뻔한 도둑 녀석이 숨어들어 올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여 달빛조차 닿지 않는 축사의 그늘 아래서 그는 오래도록 숨을 죽이고 기다렸다. 그에게는 무척이나 익숙한 일이었다. 거의 평생을 몸에 익혀온 것이었으니까.

 이윽고 머지않아, 일부러 닫아둔 문이 삐걱 소리를 내었을 때. 필라스는 망설임없이 땅을 박차고 뛰어올랐다.

 “너구나. 그간 내 사유재산에 손 댄 게.”

 숱하게 약탈당한 비상식량 강도를 마침내 붙잡기 직전이라는 사실에 필라스는 크게 고무되었다. 불도 하나 밝히지 않은 한밤중에 보통 사람이라면 아마 바로 코앞의 사물만 보이겠거니, 하는 계산도 깔려있었다. 그러나 그런 기대도 상대방이 반격하기 전에나 가능한 일이었다.

 정확하게 필라스의 목줄기를 노리고 찔러오는 하얀 창, 그리고 번뜩이는 구체는 침입자의 정체를 적어도 한 가지는 분명히 드러내주고 있었다.

 ‘빌어먹을, 템플러였나!’

 옛적부터 최고 경계 대상이었던 놈들이 여기까지. 필라스는 무심결에 늘 쓰던 수단을 꺼내들 뻔했으나 자기가 더 이상 어느 공동체에도 속하지 않는다는 것을 아슬아슬하게 떠올렸다. 그리고 문제의 녀석에게서는 아직도 짙은 피냄새가 풍겼다. 마치 뒤집어쓰기라도 한 듯. 남의 피가 아니라면 분명 여전히 아물지 못한 치명상을 달고 있을 터. 필라스는 굳이 무리해서 접근하려 들지 않고 확 거리를 벌렸다. 방금 전의 공방으로 놀란 동물들이 법석을 떠는 틈 사이로, 높고 힘있는 목소리가 들렸다.

 “……야.”

 여태 여러 갈래로 쇄도해오던 공격들은 어쩐지 필라스를 정확히 맞추지 못하고 비껴나가 애꿎은 벽만 두들겼다. 일부러 빗맞췄거나, 혹은 시선을 분산시킬 목적이었거나. 어느쪽이든. 필라스가 의도를 가늠하기 위해 거리를 두는 동안에 이번에는 침입자 쪽이 먼저 움직였다. 순식간에 거리를 좁힌 그는 필라스를 벽으로 몰아 세웠다. 지직지직 발을 끌며 뒤로 물러나던 필라스는 이내 등이 벽에 닿음과 동시에 퍽 무언가가 박히는 소리를 바로 귓전에서 들었다. 침입자가 서슬 퍼렇게 필라스의 목을 향해 단검을 내리찍으며 난 소리였다. 매끄럽게 날이 선 단검은 슬쩍 미끄러지는 것만으로도 그의 목덜미에 길게 상처를 냈다. 선득하게 핏방울이 피부를 타고 흐르는 것이 간지러워서 필라스는 이것들이 어딘가 전부 다 애들 장난 같이 느껴졌다.

 “네가 뭐하는 놈인지는 안 물을게.”

 이게 남의 영역에 멋대로 쳐들어온 사람이 할 말인가? 필라스는 조금 기가 막힌 눈으로 침입자를 내려다보았다. 생각보다 한참 시선을 내려야 하는 눈높이였다. 체격도 그리 크지 않았고. 명확한 색 구분을 위해서는 광량이 좀 더 필요하겠지만 머리칼은 확실히 짧았고 옷은 예상한 만큼, 혹은 그보다 더 너덜너덜해 보였다. 가까운 거리에서 훅 끼쳐오는 피냄새는 시시각각 선명한 향을 띠기에 본인의 상처에서 나는 피가 틀림없었다. 깊은 상처의 위치는 아마도 오른쪽의 어깻죽지, 양측 옆구리, 왼쪽 허벅지에도 하나. 자잘한 상처는 그보다 더 많을 것이다. 생각보다 그리 위협적이지는 않은 상대라고, 필라스가 판단을 내릴 무렵에도 이 영문 모를 템플러는 따박따박 제 할 말을 계속 이어나갔다.

 “대신에 나에 대해서도 묻지 않는 거야. 알아들어?”

 “해서. 그간 네가 한 약탈 행위도 불문에 붙여라 이건가?”

 필라스는 일부러 칼날이 향한 방향으로 고개를 기울이며 침입자의 객기를 비웃었다. 하얀 머리카락이 몇 가닥 잘려 후드득 떨어지는 건 신경도 쓰이지 않았다. 눈앞에 있는 존재부터가 몹시도 거슬릴 뿐더러, 그가 입은 재산 피해까지 생각하면 문자 그대로 갈아마셔도 시원찮았다. 게다가 상대는 무척이나 허술한, 아까운 피를 줄줄 흘리기나 하는 중상의 반송장이 아닌가. 몸을 가누기도 힘들 텐데, 저 목이라도 반 바퀴 틀어버리면 더 이상 고생할 필요도 없게 만들 수도 있겠다. 그렇게 한껏 상대를 깔보며 필라스가 날카로운 손톱을 감춘 손을 꿈틀거릴 적에.

 침입자는 또 한 번 생각 외의 날랜 움직임을 보였다. 아니, 그것보다는 단순한 완력에 가깝긴 했으나. 어쨌든 등을 세게 부딪쳐 생긴 아픔이 가신 뒤에야 필라스는 어느새 자기가 천장을 올려다보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맙소사, 이건 짐작도 못했다. 침입자는 그를 거의 들어올려 바닥에 메다 꽂아버린 것이다. 다 죽어가는 줄 알았더니 어디에 이런 힘을 숨기고 있었는지.

 “야. 안 물어보기로 해놓고 이런 말도 뭣하지만. 너희는 나 같은 사람 앞에서 함부로 이 드러내지 말라고 안 배우던?”

 “다 죽어가는 주제에 제법이긴 한데.”

 “어쩌겠냐? 하던 짬이 있는데 다 늙은 모기 하나 잠들기 전에 잡는 건 일도 아니지.”

 이쪽에서 상대를 가늠하는 틈에 저쪽에서도 파악을 마친 모양이었다. 어느 쪽이 우세한지 알 수 없는 형세에 필라스는 오랜만에 전투의 긴장감을 떠올려냈다. 어차피 그의 대처 방식은 선제공격도 아니었으니 딱히 지고 있다고 할 수도 없었다. 상대방이 틈만 내보인다면, 이 밑에 깔린 수모는 언제든 돌려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의 위를 차지 하고 앉아서, 멱살을 틀어쥐다시피 한 그를 사납게 올려다보던 필라스는 이내 조금 놀랐다.

 “……근데 내가, 딱 한 번 봐줬다.”

 순간적으로 비쳐든 빛 한 줄기에 비친 금빛이 어룽어룽 나부꼈다. 그와 동시에 한 품에 뜨끈한 무게감이 날것 그대로 느껴졌다. 언제였더라. 필라스는 기시감을 느꼈다. 처음으로 갓 잡은 사냥감을 한 품에 안았던 때였던가. 당장이라도 죽을 듯, 그러나 여전히 살아있다고 고동치는 뜨끈한 먹잇감이 짙은 피냄새를 듬뿍 안겨주는 순간에 느껴지는 만족감. 그러나 막연히 만족감을 느끼기에 그는 이 침입자가 아직 죽기에는 조금, 약간 많이 말미가 남았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내버려둔다면, 결과는 이르든 늦든 오늘 해가 뜨기 전에 끝이 나겠지만.

 “야. 진짜 자냐?”

 덜걱 선택지가 맡겨지는 순간은 언제나 당황할 수밖에 없어서. 필라스는 저도 모르게 멍청한 소리를 내뱉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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