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둥새] 너 없이도, 너 없이는

 첫째 날은 괜찮았다.

 둘째 날은 그럴 일이 있겠지, 라고 생각했다.

 셋째 날은 글쎄. 어땠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일주일쯤 되는 날에는 더 이상 올 필요를 못 느끼겠거니, 단념했다.

 흥미를 잃은 거지. 내 그럴 줄 알았다. 말 좀 통하는 포워르라니 잠깐 신기했다가, 이제 볼 장 다 봤다는 거지. 필라스는 아쉽지도 않았다. 아니 그럴 이유도 없었다! 정말로 그는 아무렇지 않을 수 있었다.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 엘프가 잠깐 찾아와서 멋대로 휘젓고 다녔다 한들, 그게 그래서 고작 1달은 되었나? 필라스도 본래의 삶을 다시 회복하면 그만이었다.

 본래대로.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굴속에 칩거해서. 병적으로 숨죽인 채로. 세상 모든 것에 관심을 두지 않았던 시절 그대로.

 필라스에게 체념하는 것은 무척이나 익숙했다. 결국 언젠가는 일어날 일 아니었던가. 그저 자기에게 선택의 여지가 없었기 때문에 마음이 번잡해졌으려니. 차가운 돌벽에 기대어 오래도록 생각해도 나오는 결론은 그 정도였다. 그러다 그는 눈앞을 가리는 커다란 펜던트에 뒤늦게 시선을 빼앗겼다. 어느 날 아퀼라가 그에게 쥐어주었던, 자기가 갖고 있던 로켓 펜던트를 반으로 쪼개 만든 반쪽짜리 목걸이였다. 본래는 왼편 덮개인 그 조각은 이제 아퀼라의 마력이 일부 담긴 화살촉 파편으로 채워져 있었다. 매일 걸고 다니라고 그렇게 성화더니. 주인은 온데간데없고 목걸이만 남아버렸다. 아니, 그것보다도.

 “……내가 어떻게 서있는 거지.”

 상하 좌우가 거의 비슷한 던전 내부를 발 닿는 대로 걷는 척 몸을 띄워 움직였더니 바닥이라 생각한 면이 오히려 천장이었다. 자각도 못하는 사이에 중력에 이끌린 펜던트가 끝내 옷깃 사이에서 삐져나와 눈앞에서 달랑달랑 거리는 이유였다. 벽에 걸린 횃불들이 거꾸로 타오르며 연기가 바닥으로 치솟는 듯한 기이한 모양에 필라스는 실없이 웃음이 비죽 나올 것 같았다.

 ‘또 또 멍청한 짓 하지.’

 들릴 리 없는 목소리가 산들바람처럼 스며들었다.

 결국 마침내. 아퀼라가 찾아오지 않게 된 지 3달 하고도 15일 되는 날에 필라스 또한 칩거하던 던전에서 밖으로 뛰쳐나왔다. 환한 빛이 쏟아지는 아래 눈에 띄는 게 신경 쓰여 후드까지 깊게 눌러 쓴 채로. 뿔도 숨겼으니 알아볼 이는 없겠지만. 혹시라도. 그늘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드넓은 사막을 가로지르며 필라스는 찡그린 눈을 들어 지평선 너머를 가늠했다.

 ‘사는 곳이 여기서 가깝냐?’

 ‘말 타고도 한참 달리는 거리인데 가볼래?’

 ‘치워…….’

 ‘오아시스 하나 끼고 있는 손바닥만한 마을이지만 이 어두침침한 곳에 비하면 아주 천국 같은 곳이란다.’

 이럴 것 같았으면 진작에 제대로 된 지명이라도 물어볼 것을. 모래 섞인 바람을 손바닥으로 가린 그는 더운 숨을 내뱉었다. 그 천국 같다는 곳이 얼마나 좋길래. 그래서 어두컴컴한 던전 지하 바닥은 영영 묻어버리기로 했는지. 그 잘난 영웅 출세의 길이 드디어 트여서. 고작 악기 연주가 전부인 시시한 몽마는 아무래도 상관없어 진 건지. 그렇다면. 그런 거라면.

 “나도 참, 한심하지.”

 무엇을 확인하고 싶어서 이 고생을 사서 하고 있는가. 필라스는 픽 헛웃음을 지었다. 후드로 막아도 햇빛은 너무나도 강렬했고 작열하는 햇빛에 달궈진 모래는 디디고 선 발을 녹일 듯 열기를 날름거렸다. 도무지 천국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 이 황무지 한가운데서.

 ‘이건 앞으로 네가 내 소유라는 증거다.’

 ‘갑자기 또 무슨 시비지?’

 ‘네가 밖에서 길을 잃고 헤매다 발각되면 내가 네 신분을 증명해줄 수 있다는 거지.’

 ‘증명과 소유는 매우 다른 사안 아닌가?’

 ‘서류 작성 한 번도 안 해봤을 게 자꾸 말대꾸할래?’

 ‘말을 말자.’

 ‘됐고. 너도 여기다 넣을 만한 물건 아무거나 내놔.’

 그 때 아퀼라가 멋대로 가져 간 게 있었지. 그게 뭐였더라. 필라스는 거의 사고가 되지 않는 머리로 뭐든 생각하려 애썼다. 그러나 도무지, 한 걸음 내딛는 것조차 어려워서. 몇 번인가 균형을 잡으려 애쓴 보람도 없이 몸이 기우뚱 기울어져 그는 결국 모래를 사방으로 튀기며 넘어지고 말았다. 아프다는 것을 느낄 새도 없이 그저 혼곤했다. 여러 갈래로 흐르는 바람탓에 모래가 한 겹 한 겹 저를 덮는 것을 알아도 꼼짝도 할 수 없었다. 그저 피로했다.

 “……살았나?”

 흐릿한 시야에 누군가의 그림자가 어른거려도 필라스는 그리 걱정되지 않았다. 시도 때도 없이 무엇이든 생각나는 대로 졸라대던 목소리가 비로소 그에게 다시 찾아왔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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