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게, 어쩌다보니

 

 달도 뜨지 않은 깜깜한 밤을 틈타서, 다니엘은 저택을 빠져나가기 위해 고군분투 중이었다. 눈에 보이는 것이 거의 없었으나 그것은 추격자 쪽에서도 똑같은 조건이 될 테니 그에게는 아쉬울 것이 없었다. 다니엘은 돌이나 마른 잎사귀 따위를 밟지 않도록 주의하면서 어둠에 익숙해진 눈으로 주위를 살폈다. 분명 낮에 거리를 재보았을 때에는 한달음에도 닿던 정문이 지금은 턱없이 멀었다. 그래도 한 중간까지는 온 거 같은데? 애써 희망을 놓지 않으려고 그는 스스로를 치하했다.

 “……!”

 안심할 틈은 그리 오래 주어지지 않는다. 그새 가까워진 인기척에 다니엘은 적막을 향해 있는 청각을 더욱 주의 깊게 발휘했다. 푸른수염의 충실한 추격자들은 과연 악명만큼이나 끈질겼다. 사냥감을 찾지 못하면 남은 시체라도 찾아낼 기세였다. 어느새 가까이 들이닥친 횃불이 다니엘이 숨은 나무 그림자를 날카롭게 찔러들었다. 아슬아슬하게 발끝을 그림자 속에 숨긴 다니엘은 숨까지 멈추었다. 멀어지는 발소리조차 확실하지 않았다. 한동안 그는 굳은 자세로 오랫동안 붙박여 있어야 했다.

 빌어먹을. 입과 코를 동시에 손으로 가린 다니엘은 절로 초조해졌다. 저택 안의 경비가 종일 이 정도로 삼엄할 줄은 전혀 몰랐다. 그가 ‘아멜리’ 로서 푸른수염과 결혼하기 위해 이 저택으로 온 이후로 종일 저택에 머무를 때는 드나드는 사람을 거의 본 적이 없었으므로. 괜한 사실을 들킬세라 일부러 찾지도 않았지만. 그러나 그렇다고 같이 온 백작 영애의 소식마저 아무도 모른다는 것을 알고 난 이후로는 기이하다 못해 두려워졌기에. 그러니 아마도, 어쩌면 두 달이나 지났으니 제 존재감 또한 이곳에서 흐릿해졌을 거라 짐작하고 편한 복장으로 뛰쳐나온 것이건만.

 만반의 준비를 갖추었다 생각하고서도 끝내 다니엘이 놓친 패착의 원인은 그를 쫓을 사냥개들은 유례를 찾을 수 없이 몹시도 예민한 감각으로 집요하게 추적한다는 점이었다. 잠깐 횃불에 그림자가 밟혔을 뿐이었다. 그러나 경비병들이 순식간에 경계도를 올려 일사분란하게 추적하는 것이 거의 왕실 기사단에서나 볼 법한 체계였다.

 ‘—저택을 홀로 빠져 나가는 것은 금한다.’

 과도한 긴장과 빨라진 맥박으로 인해 부쩍 높아진 체온으로 다니엘은 골을 찡 울리는 두통에 눈을 찡그렸다. 뛰쳐나온 이유도 잊어버릴 정도로 하얗게 탈색된 뇌리에 별안간 꽂히는 경고는, 글쎄, 언제 들었더라. 이제 잘못되면 그래서 어떻게 되는 거지? 과한 스트레스는 과연 사람을 돌아버리게 하는가보다. 웃을 일이라고는 없는데 어쩐지 그의 입술은 비죽비죽 호선을 그렸다. 될 대로 되라는 마음으로, 다니엘은 낮은 자세를 유지한 채로 한 걸음 한 걸음 내딛었다.

 알고 싶으니까. 그것이 설령 생존에 썩 도움이 되지는 않더라도.

 멀리 보이는 산등성이 저편에서 흐릿하게 동이 트려고 했다. 시간이 그만큼이나 흘러버렸다. 이미 글렀다는 짙은 패배감이 발목을 향해 족쇄처럼 들러붙어도 걸음을 멈추지는 않았다. 무거운 걸음은 마침내 눈여겨 봐두었던 조금 부스러진 담벼락 아래에 이르렀다. 어느새 땀으로 흠뻑 젖은 앞머리가 눈을 가리지 못하게 쓸어넘긴 그는 자기가 뛰어넘어야 할 높이를 멀게 올려보았다.

 지금의 다니엘에게는 거추장스러운 드레스자락도, 무겁게 짓누르는 장신구들도 없었다. 어린 시절 숱하게 해본 것처럼 그는 벽을 짚고 수월하게 뛰어올랐다. 뛰어오른 몸이 다시 지면으로 착지하는 순간부터 허리께까지 닿는 금빛 머리카락이 내려앉는 순간까지. 그늘 한 점 없어야 하는 곳에 밤그림자보다 더 음울한 어둠이 드리운 것을 다니엘은 모른 척 할 수 없었다.

 “나의 새로운 아내께서는 여러 재주를 가지고 있는 모양이지.”

 이거 정말 높게 쌓은 건데 말이야. 벽을 손등으로 툭툭 치며 하는 말은 자랑하려는 기색은 하나 없이 담담히 사실만을 이르는 목소리로 들렸다. 그러나 덥수룩한 검은 머리칼 사이로 보이는 푸른 시선은 흉흉하기만 했다.

 푸른수염. 바스티앵 드 플뢰블레르. 경계의 감시자. 드높은 명성만큼이나 매해 배우자를 갈아치우는 것으로 유명한 사람. 다니엘은, 아니 ‘아멜리 비센베르크’ 는 그의 52번째 결혼 상대였다. 심지어 그 날의 신부는 두 명이었다. 어디까지나 표면적으로는. 그 날 이후로 두 달 내내 다니엘은 바스티앵을 한 번도 마주한 적이 없었다. 그리고 이제, 있어서는 안 될 방식으로 얼굴을 마주 보게 되었다.

 “하면, 크흠. 신기한 것을 보여드렸으니. 이번에는 살려주시렵니까?”

 제기랄. 말이 조금 떨리는 바람에 다니엘은 혀를 깨물고 싶었다. 이미 금기를 어긴 마당에, 꼴사나운 꼬락서니까지 보여줄 필요는 없지 않은가. 그는 답답하게 목을 죄이는 것 같은 와이셔츠 목깃을 잡아당겼다. 마른 침을 삼키고, 눈을 도르륵 굴려 분위기를 파악하려 애썼다. 성벽은 어떻게든 뛰어넘었어도, 더 커다란 위압감으로 세워진 눈앞의 철벽은 도무지 넘어갈 엄두도 나지 않았다. 눈높이가 반대였더라도 결코 만만하지 않았으리라.

 “내가 말을 어렵게 했었던가?”

 내려질 처분을 기다리던 다니엘은 갑자기 던져진 질문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대화라고는 제대로 해 본 적도 없는 사이에 무슨 말일까. 멀뚱하게 멍청히 쳐다보기만 하자 푸른수염은 혀를 차듯 한숨을 내뱉었다. 단숨에 주변 대기가 얼어붙는 듯한 착각에 다니엘이 흠칫 몸을 물리기도 전에, 굳은살로 인해 울퉁불퉁한 손이 더 빠르게 다가왔다. 그는 간신히 그 움직임을 눈으로만 쫓을 수 있었다. 그것은 확정적으로 자기를 처분할 것이라 직감하면서.

 “그렇지도 않으면, 그조차 이해 못할 정도로 어리석은 건가? 유감스럽군.”

 “큭, 헉!”

 양손검조차 쉬이 휘두르는 악력을 가진 손이 다니엘의 목줄기를 휘어잡았다. 철의 단단함을 고려한다면 기사조차 아닌 다니엘은 어딜 붙잡든 갈대만도 못한 내구성일 것이 분명했다. 숨이 막혀 사지에 힘을 실을 수도 없는 다니엘은 끅끅 신음하며 푸른수염이 끌어당기는 대로 끌려갔다. 파들거리는 발끝은 어느새 지면에서 떨어져 허공을 휘젓고 있었다.

 “실로 유감이야. 그대의 정체도 묻지 않을 거고, 뭘 하든 자유지만, 혼자 저택 밖으로 나가지만 말라고 분명히 경고했는데.”

 다니엘은 희박해지는 호흡 속에서 푸른수염이 하는 말조차 들을 수 없었다. 그런 주제에, 어떻게든 뜨고 있는 눈에 비친 상대의 얼굴이 어쩐지 측은해하는 것 같아서. 그것이야말로 숨이 넘어가기 직전에 한 착각일 것이라고 남일처럼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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