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라비] 따뜻한 풍경과 다정한 감정 사이 잃어버린 나

 

따뜻한 풍경과 다정한 감정 사이 잃어버린 나 (22/12/29)

 

 한 번도, S는 자기가 잃어버린 기억에 대하여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그것이 필요할 때도 없었거니와, 아쉬움을 느낄 까닭도 없었으므로. 그리고 애초에. 보통 사고를 겪지 않은 사람 중에 고등학교, 중학교, 초등학교를 다닐 무렵에 뭘 했는지 세세하게 기억하는 사람도 몇 없더라. S는 어느새 더 이상 핑계를 대지 않고도 비어버린 스스로에게 적응할 수 있게 되었다.

 그렇다 하여, 그에게 지나온 길을 되짚어보는 순간이 아주 찾아오지 않는 것도 아니었다.

 “이런 게 있네.”

 으레 집을 쓸고 닦으며 평소 손도 안 대던 곳까지 샅샅이 먼지를 뒤져내며 청소를 하다보면 생각지도 못한 물건들이 툭툭 튀어나오기 마련이었다. 언제 떨어진 건지 모를 냉장고 밑 틈새에서 튀어나오는 동전들 (이건 이제 내 용돈이야! S는 반갑게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미처 버리지 못한, 어디서 삐져나온 것인지도 알 수 없는 나사들 (설마 문짝 삐걱삐걱하던 게 이거 때문인가? S는 의심스러운 눈으로 제 방의 문짝을 노려보았다). 소파 뒤에 떨어져 있는, 꽤 고급품으로 보이는 만년필이라거나 (이거 중고 판매 앱에 올려버릴까? S는 일단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P가 아니면 잘 들어가지 않는 서재에 번잡스럽게 널려진 책과 종이들.

 S는 당장이라도 먼지덩어리가 떨어질 것 같은 책꽂이 위를 노려보며 갖가지 청소도구를 바닥에 늘어놓았다. 책상 위에서 바닥까지 흘러내린 종이들을 대충 한 켠에 쌓아두고 아무 페이지나 펼쳐진 책들은 대강 모서리를 접어두고 덮어서 책장의 빈 칸에 아무렇게나 우겨 넣었다. 그것만으로도 이미 각오한 것 이상의 먼지 덩어리들이 바닥에 낭자했다. 일차적으로 바닥을 쓸어낸 그는 이번에는 본격적으로 책장 속까지 먼지떨이로 쓸어냈다. P가 있을 때는 건드리지도 못하게 하는 통에 그가 이 안을 청소할 수 있는 날은 고작해야 달에 두어 번이 최대였다.

 “청소나 제대로 하지. 망할 놈이.”

 P는 사무소에 등록된 해결사 사이에서도 의뢰 수주율과 성공률이 소속된 해결사 사이에서 월등했으므로 퇴근이 두서없기는 예사로운 일이었다. 돈에 미친 새끼. S가 보기에 P는 돈을 산같이 쌓아놔도 만족 못할 사람으로 보였다. 그가 딱히 사치를 하거나, 허투루 쓰는 것을 본 적은 없었어도. 무언가 강박증에 걸린 것 같은 사람들처럼, P는 돈을 긁어 모으는 것 외에 다른 일을 생각해본 적 없는 것처럼 행동했다. 여러모로 S와는 맞지 않는 성격이었다.

 그럼에도 여지껏 몇 년을 어떻게 같이 한 지붕 아래 살았나 하면.

 “아.”

 S는 책장의 맨 아래쪽, 규격이 큰 책들을 넣기 위해 마련한 공간 가장 구석에 놓인 졸업앨범을 발견했다. 잘 꺼내지도 않은 듯 손때도 묻지 않은 그 졸업앨범에는 14년 전의 연도가 적혀 있었다. P의 고등학교 졸업앨범이 틀림없었다. P는 S의 2년 선배였으므로, S가 2학년으로 진급하는 때에 그는 졸업생으로 졸업 다음의 진로를 향해 걸음을 내딛었던 해.

 P는 그 이전 해에 있었던 일은 물론, 그 이후 S의 행적에 대해서도 언급하기를 꺼려했다. 꺼려한다는 말로 끝나면 다행이지. 네가 그걸 알아서 뭐에 쓰냐는 투로 사람을 아주 엿 먹이는 소리만 골라서 해댔다. S 또한 그 태도를 보면 당장에 있던 호기심도 남김없이 불타 사그라지기 일쑤였다.

 분명 딱히 떠오르지 않는다 하여 불편해질 일이 많아질 종류의 기억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따금, S는 스스로가 P의 선을 넘었음이 확실하다 느낀 순간에도 큰 문제없이 넘어갈 수 있었는지 그 이유가 궁금했다. 그것을 알려면 그들이 가장 처음에 만났던 때의 기억이 답일 것 같아서. 가장 간단한 해결법을 두고 멀리멀리 돌아가야 하는 것은 S의 성미에 맞지 않았다.

 “누가 누군지도 모르겠네.”

 언젠가는 봤을지도, 아니었을 지도 모르는 앳된 얼굴들이 S의 눈앞에서 파라락 넘어갔다. S가 겨우 구분할 수 있는 얼굴은 어느 사진에서든 보랏빛 머리칼을 항상 질끈 하나로 묶고 다니는 이 하나 뿐이었다. 빛을 차단하는 짙은 색 고글까지 더해지면 그 학생의 이질감은 배로 늘어났다. 마지막 장에 이르러, 표지와 종이 사이에 걸린 사진 한 장이 흘러내려 떨어진 순간에, S의 눈은 한동안 그 사진에 고정되고 말았다.

 붉은 머리의 학생과 보랏빛 머리의 학생이 서로 드잡이질을 하며 싸우는 장면이 찍힌, 굉장하다면 굉장한 박력의 사진이었다.

 “…….”

 더욱 놀라운 것은, 그것을 보고도 아무런 감흥이 일어나지 않는 스스로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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