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렌비스] 내 마음은 불길이 되어 나를 태우고

 

 

내 마음은 불길이 되어 나를 태우고 (23/07/16)

 

 R은 언제나 W를 쫓아다니기 바빴다. W가 그럴 필요 없다고 말리는 목소리는 거의 닿지 않았다. R은 어딘가 조급해지는 스스로를 말릴 수 없었다. 그것은 그들의 나이차에 의한 문제인지도. 혹은 그저 배배 꼬여있는 불량한 마음가짐의 문제인지도 모르지만. R은 언제나 W를 바라보고 있었다. 일방적인 감정을 퍼붓고 있다는 자각은 마음 한구석에 항상 있었다. 그럼에도 R은 다른 사람을 보는 W가 마음에 차지 않았다. 언제나.

 W가 다른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화사하게 웃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자면.

 R은 울렁거리는 가슴을 다시금 부여잡았다.

 “왜 그래?”

 “뭐가요?”

 “너 지금…….”

 또 기분 안 좋잖아. W는 불쑥 튀어나온 말을 제대로 마무리 짓지 못하고 끝을 흐려버렸다. 이맘때의 R은 좀처럼 말을 귀담아 듣지 않는 탓이다. 괜한 말다툼은 하기 싫어서 W는 R에게 향했던 고개를 돌렸다. 날도 화창하게 맑은, 가끔 매미가 우는 여름날의 오후. 모처럼 퇴근 시간과 하교 시간이 겹쳐 생긴 귀한 시간인데 헛되게 날리고 싶지도 않았다. 그렇게 한 걸음 앞서서 걸어가는 W의 뒤에서, R은 눈앞에서 흔들리는 옅은 금발만을 멀거니 바라보고 있었다.

 결국 또 다시. R은 타오르는 작열감이 제 가슴을 새까맣게 잿가루로 태워버리는 것을 내버려두었다. 이 감정이 정말로 단순히 자기가 그보다 어리다는 이유 탓일까? 아니면? 그는 시꺼멓게 가라앉은 한 무더기 감정 속에서 날 선 충동이 불쑥 튀어나오려는 것을 내리 누를지 잠깐 고민했다. 자꾸만 자기에게서 벗어나는 저 푸른 시선을 붙잡아버린다면.

 고민한 것이 무색하도록 R은 새가 날갯짓하는 듯 가벼운 악력으로 W의 어깨를 잡아 뒤돌아 세웠다. 비로소 마주한 푸른빛은 소용돌이치며 들썩이는 혼란한 호수를 보여주고 있었다. 조금만 더 이지러진다면, 금방이라도 눈물을 떨어뜨릴 것처럼.

 “너 정말 왜 이래?”

 “그러게요.”

 “……됐어. 오늘 같은 날까지 너랑 말싸움하고 싶지 않아.”

 “오늘이 무슨 날이라서요?”

 R은 빠르게 기억해둘 만한 날짜를 되짚었다. 하지만 짚이는 날짜라고는 하나도 없었다. 지극히 당연한 수순으로 이유를 물었지만 돌아오는 것은 냉정한 내쳐짐이었다. 제 어깨를 잡고 있는 손을 빠르게 쳐낸 W가 다시 R을 등졌다. 성큼성큼 먼저 몇 걸음 걷다가, 뒤따라오는 발걸음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은 순간에 다시 멈추어 섰다. 그가 뒤를 돌아보는 순간에, 서너 걸음 떨어진 사이를 채우는 것은 훨씬 더 멀리 떨어져 자랐어도 서로 가지를 뻗어 하늘을 메운 그늘 아래로 줄기차게 우는 매미 소리뿐이었다.

 “그냥. 싸우기 싫은 날이라고 하면 안 돼?”

 “…….”

 “너는 매번 이럴 때마다……아냐 됐어.”

 W라고 대화를 포기한 적은 없었다. 오히려 끈질기게 시도했지만, 그 횟수만큼 거부당하기 일쑤였을 뿐이다. 그 때마다 곱씹어야 했던 막막함과 좌절감을 이 순간까지 끌고 오긴 싫었다. 기어코 치솟은 울분이 눈앞을 흐려버리기 전에 W는 마음을 다잡으려 애썼다. 그러다 서너 걸음 떨어진 폭도 단숨에 큰 보폭으로 따라잡는 R을 앞에 두고는 표정 관리도 할 수 없었다.

 항상 어린애처럼 떼쓰는 모습만 보다가. 이렇게 덜컥, 사실은 자기보다 키도 훨씬 큰 성인이라 느껴지는 순간에.

 너는 꼭 이럴 때만. W는 부릅뜬 눈이 이지러지기 직전에 R에게서 홱 고개를 돌렸다. 꼭 지금 이 때를 기다린 것처럼 굴기 싫었다. 그가 화를 내어야만 눈치라도 보는 R이 괜시리 더 미웠다. 퍽이나 어른스러운 생각이어서, W는 끝내 스스로마저 미워졌다. 그런 그에게 선뜻 내밀어지는 손이 불쑥 현실감을 싣고 다가와 팔을 그러쥐었다. 질끈 눈을 감는 순간에, 변함없이 썩 다정하지만은 않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말을 해야 안다고 했잖아요.”

 “…….”

 R은 한 번을 제대로 사과하는 법이 없었다. 설령 잘못했다는 말을 꺼낸다 한들 받아들여줄 마음조차 없는 지금에도 W는 그것이 얄미웠다. 다시금 고개를 쳐드는 울분에 붙잡은 손을 쳐내려는 때에, R은 조금도 밀려나지 않고 꿋꿋하게 W와 눈을 마주치려 들었다. W는 짜증스럽게 말했다.

 “하지 마.”

 “그럼 뭐가 마음에 안 들었는지 확실히 말해요.”

 “듣지도 않을 거면서.”

 “W가 말하는 건데, 제가 왜 안 듣겠어요.”

 R의 뻔뻔한 입술이 또 다시 뻔한 말을 늘어놓았다. 듣기야 귀가 있으니 듣겠지, 그래놓고 자기의 행동 양식을 고치지 않으니 문제라고 하는 게 아닌가. 절로 목 끝까지 차오르는 한숨을 내뱉는 W의 귀에 비슷하게 한숨 섞인 목소리가 스쳤다.

 “유치하게 굴기 싫어서 그래요.”

 “너 지금 충분히 그러고 있어.”

 “아 그래요? 그러면 아예 주저앉아서 생떼라도 써볼까요?”

 “……하지 마.”

 아주 당당한 헛소리에 대답할 기력도 없어졌다. W는 한참을 허공을 바라보다가, 이내 픽 웃어버리고 말았다. 아, 이래서 싫었는데. W는 날 섰던 감정이 파스스 흩어지는 것을 붙잡아둘 수 없었다. 괘씸한 어린 연인은 이미 그가 기분이 풀어졌다는 것을 귀신같이 알아챘다.

 “웃으니까 얼마나 예뻐요.”

 “수작 부리지 마.”

 “당신이 인기 많은 게 나빠요. 저만 보면 되는데.”

 “그게 말이 돼?”

 사람은 사람 사이에서 살아야 하는 법이다. R과 원만하게 공존할 수 있다 한들 그것만으로는 살 수 없을 것이다. 그 당연한 사실을 다시 주지시키는 대신 W는 R의 이마를 툭 쳤다.

 “유치하게 굴기 싫다면서.”

 “그래요. 그럼 이번만 봐줄게요.”

 R은 그렇게 짐짓 자기가 이해해준다는 척 주절거렸다. 속에서 들끓는 질투가 그리 쉬이 사그라지지 않았어도, 그는 은근슬쩍 W의 허리에 팔을 감는 것으로 제 감정을 모른 척하기로 했다. 내심 어른스러웠다고 자축하는 것을 알아차렸는지 어쨌는지, W의 손이 똑같이 그의 허리에 닿는가 싶더라니, 그 고운 손으로 불쑥 말랑한 살을 꼬집었다. 아야! R이 펄쩍 뛰든 말든, W는 그저 무심한 표정을 고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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