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렌비스] 다정하지 않은 나의 세계에게

 

다정하지 않은 나의 세계에게 (22/10/2)

 

 아르카비스는 호수 모퉁이의 둔덕에 앉아 있었다. 호수는 호수지만 이곳은 그 중에서도 석호라 불릴 바닷가 인근의 장소였다. 오가는 사람들의 발길도 없어 주변에 사람이라고는 아르카비스 그 뿐이었다. 너무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는 고요한 흐름이 퍽 마음을 사로잡았다. 눈앞에는 하늘을 이고 그 푸른 빛을 담아낸 새파란 장막이, 등 뒤로는 호수를 빙 둘러싸고 마구 자라난 풀밭 사이사이에서 온갖 풀벌레 소리만이 무성했다.

 그러니까, 이 땅 위에 온전히 자기 자신으로 존재할 수 있는.

 짭조름한 해수의 냄새가 코끝에 감돌았다. 아르카비스는 주저 앉은 몸을 끌고 물이 닿는 경계까지 기어가듯 향했다. 이윽고 물이 뭍에 닿는 경계에까지 이르러 젖은 흙 위로 손을 짚었다. 파도가 넘실거리듯 바람을 타고 이지러지는 표면장력 위로 제 모습이 비치고 있었다. 짭짤한 소금기 담긴 바람에 이리저리 흔들려 엉킨 옅은 색소의 금빛 머리카락 아래 갈 길 잃은 표정 가운데서 빛나는 청색과 레몬색의 눈동자가. 그는 이따금 제 모습이 반사된 거울상을 볼 때마다 정말 자기가 이렇게 생겼는지 현실감을 느끼지 못했다. 조심스레 양 뺨을 손바닥으로 가리듯 감쌌다. 보들보들한 그 살결을 주무르자 쓰고 있던 안경이 자연히 비스듬해졌다.

 아르카비스가 손장난을 치는 사이에도 맑은 호수 표면은 자기 안의 다양한 생태계를 가감없이 드러내보였다. 크고 작은 어류종들이 저마다 떼지어 다니며, 한없이 깊은 호수 바닥까지 군체의 행렬이 이어졌다. 일반인의 시력으로는 닿을 수 없을 그 행렬의 끝을 헤아리던 아르카비스는 삐딱한 안경 렌즈 너머 어떤 가시고기와 눈이 마주친 듯도 했다.

 착각이겠지.

 오히려 아르카비스는 등 뒤에서 드리워지는 익숙한 그림자를 피할 수 없었다. 아니, 피하고 싶었던가? 그는 물끄러미 시선을 돌려 그림자가 새로이 가져온 하늘색이 호수 위로 흩뿌려지는 것을 보았다. 바람 부는 대로 흔들리는 짧은 머리카락 아래로 평정을 가장한 한 쌍의 시선과 마주쳤다. 얼굴에서 떨어져 나가고도 갈 곳을 잃은 손이 무심결에 풀무더기 위를 짚었다. 막 피어나기 시작한 푸른 꽃 한 줌이 손바닥 아래에서 으스러졌다.

 “빨려 들어 가겠어요.”

 “…….”

 아르카비스는 몸을 일으키지는 않고, 고개만 돌렸다. 에쉬레스토는 제법 체격이 컸으므로 그것으로는 고작해야 허리께에 흔들리는 가죽 재킷 끝자락만 겨우 볼 따름이었다. 일어날 기미도 없이 가만히 시선만 보내자 에쉬레스토는 이내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왔다. 딱딱한 구둣발 아래에 짓눌린 푸른 꽃들이 제 잎을 토해내고 산산히 부서져갔다. 되돌릴 수 없이 으깨져가는 파편들에서, 아르카비스는 오래도록 눈을 뗄 수 없었다. 그것들을 그러모은다 한들 부질없는 일로 끝날 것을. 그는 똑같이 제 손 아래에서 문드러진 것들을 보았다.

 아르카비스가 유일하게 알고 지내는 이는 부질없는 짓거리에 인생의 반을 써버렸다 했다.

 마중을 나온 이가 있으니 이제 돌아갈 시간이었다. 아르카비스는 숙였던 몸을 순순히 일으켜 세웠다. 예상한 것과 다르지 않게 바지는 꽃물과 풀물이 질게 뭉친 흙과 섞여 콜라주가 되어 있었다. 검은 색에 가까운 바탕이라 그것은 더욱 눈에 띄었다. 아르카비스가 아무렇지도 않게 흙더미들을 맨손으로 털려고 하자 에쉬레스토는 서둘러 코앞까지 다가왔다.

 에쉬레스토는 귀한 대리석 조각상이라도 대하는 양 포켓에서 꺼내 든 손수건으로 직접 물든 부분을 닦기 시작했다. 아르카비스는 제 앞에 한쪽 무릎을 꿇은 그를 말없이 내려다보기만 했다. 아르카비스는 도무지 돌려줄 말을 찾을 수 없었다. 스스로 보잘것없는 티끌같은 것에 손을 더럽힐 것 같으면 기겁을 하는 그에게. 그러면서도 그런 순간이 아니면 언제나 한 발짝 물러나 거리를 두는 그에게.

 모든 행동의 이유를 물어보면 너무 좋아해서요, 따위의 말로 얼버무리는 그에게.

 그런 주제에 대화할 때는 눈도 마주치지 않지.

 에쉬레스토가 들려주는 말은 항상 듣기 좋게 무척이나 달았다. 그대로 삼키면 그 달콤함에 질식할 정도로. 곤란함을 면피할 만큼의 대답 뒤에 남는 쓴맛은 아르카비스에게 애매한 자기 위치를 상기하게 했다. 좋아한다고 말은 하지만 손은 잡지 않는다. 뭔가 하고 있으면 관심을 보이지만 다가오지는 않는다. 행복하냐고 물어보지만 그러면서도 자기가 주체가 되려고는 하지 않는다. 깨닫지 않으려고 해도 눈에 들어오는 모순들은 마치 그럴듯한 꿈을 꾸는 것 같아서. 아르카비스는 에쉬레스토와 같이 있을 때마다 현실성이 느껴지지 않았다.

 작위적인 행복. 안정감. 누군가가 억지로 쥐어주려는 만족감…….

 아르카비스는 때때로 에쉬레스토와 마주하는 것이 버거워 심히 거북했다.

 “그만 해. 됐어.”

 “조금만 더 털면 될 거 같아요.”

 에쉬레스토는 고집스럽게도 아르카비스의 앞에서 물러나지 않았다. 그렇게 닦아봐야 얼마나 깨끗해진다고. 아르카비스는 제법 귀찮은 기분도 들었지만 에쉬레스토는……확신이 필요했다. 실상은 자기가 불안하니 바짓자락이나마 놓지 못하고 있는 것이었다. 고르고 골라서 즐겨 찾는 장소라는 게 하필이면 이 호수라니. 그는 아르카비스가 이곳을 즐겨 찾는 것이 과거의 연장선인가 의심스러웠다. 분명 지금의 아르카비스에게 이전의 경험은 없을 텐데.

 다 알고 있어도, 에쉬레스토는 당장이라도 눈앞의 아르카비스마저 호수 밑바닥으로 추락할까 두려웠다.

 손수건으로 아무리 문질러봐야 흙자국은 더 깊게 섬유 사이로 스며들 뿐이었다. 그 날의 기억이 뇌리에서 사라지지 않는 것처럼. 에쉬레스토는 부질없음을 알면서도 몇 번이고 더 문질렀다. 흙빛으로 같이 물든 손수건이 덜덜 떨고 있었다. 그것을 잡고 있는 손 또한. 그러면서도 그는 차마 얼룩보다 더 높은 곳을 바라볼 수 없었다.

 그 날의 기억을 다시 떠올리게 할 것 같은 아르카비스의 평온한 얼굴을……보고 싶지 않았다.

 “돌아갈 거죠?”

 내뱉고 나서야 에쉬레스토는 상대방의 입장에서는 이해하기 어려울, 현 상황에서 벗어난 물음인 것을 깨달았다. 반사적으로 아르카비스를 바라보니 아니나다를까 그는 뜬금없는 질문 뒤로 사라져버린 행간을 쫓지 못하고 굳어 있었다. 평소부터 그닥 표정 변화가 없는 편이었으나 그렇다고 처음부터 같이 살아온 에쉬레스토의 눈을 피할 수는 없었다. 아르카비스는 명백하게 완벽한 답을 한 번에 꺼내려 두뇌 회로를 과열시키고 있었다.

 에쉬레스토는 아르카비스에게 부러 말하지 않은 것이 많았다. 그는 타고나길 거짓말에 자기 자신까지 속이는 것이 천성이었다. 그러나 이제 아르카비스에게는 더 이상 거짓말로 속일 재간이 남아있지 않았으므로 차라리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쪽을 택한 것이다. 그것이 그리 효과적이지 않은 것은 진작에 알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에쉬레스토는 뻔한 거짓말로 둘러대지 않았다. 이상한 낌새를 알아챈 아르카비스가 의심을 거두게 만들지 않았다. 그가 의문을 해결하기 위해 온갖 미심쩍은 부분을 파내더라도. 그래서 수면 밑에 깊게 묻어놓은 끔찍한 진상이 드러나더라도. 그 뒤의 일은 기꺼이 그가 감내해야 할 일이었다.

 “……내가 갈 곳이 어디 있다고.”

 그러니 아르카비스가 대답해줄 수 있는 말도 자기가 생각할 수 있는 범위 내로 한정되었다. 그 사실을 모르지 않으면서 에쉬레스토는 곧이곧대로 듣지를 못하고 고약한 심보로 멋대로 왜곡해 받아들였다. 제가 가두어 둔 탓에 달리 갈 만한 곳을 알지 못해 가지도 못한다고. 이 또한 그의 천성이었다. 누구나 자기 안에 솔직하지 못한 점은 있다고 온갖 거짓을 품고 산 자의 말로였다. 그러니 에쉬레스토가 할 수 있는 것은 반향어처럼 튀어오른 말을 내리 누르는 것뿐이었다.

 “그래요. 그럼 가요.”

 에쉬레스토는 아르카비스의 손을 잡는 것도 없이 바로 앞서나가 걸었다. 평소와 다를 것 없었으므로 아르카비스는 별 생각없이 그 걸음 끝을 쫓아 걸었다. 그에게 신경 쓰이는 것은 이제 자기 바지보다 더 심하게 더러워진 에쉬레스토의 바지였지만, 정작 주인은 대충 털었으니 되었다는 투였다. 아까 전까지 그렇게 남의 옷은 박박 닦아대더니 자기 일에는 저리 무심했다. 하루이틀 일도 아니었으니 아르카비스는 한숨조차 나오지 않았다.

 한데 뒤엉켜 호숫가로 흩뿌려지는 으스러진 형체들을 뒤로한 채, 아르카비스는 거의 잡은 것 같은 답이 다시 멀어지는 것을 느꼈다.

 

 

 ―호수 밑바닥에는 분명 뭐가 되었든 심상찮은 것이 묻혀 있음이 틀림없다.

 흐릿하지만 모를 수가 없었다. 하릴없이 걷다보면 언제나 발끝은 그 호숫가로 향하고 있었다. 까닭을 알지 못하니 에쉬레스토가 이따금 이유를 물을 때 아르카비스는 애매한 대답만 돌려주었다. 남는 것은 어디까지나 불확실한, 희미한, 그의 것이 아닌……그리움?

 언제부터였던가, 아르카비스는 자고 일어날 때마다 축축해진 베개를 보고는 했다.

 눈을 뜨면 무슨 일인지 알아볼 수도 없는 것 따위에. 아르카비스는 눈을 깜박여 남아있는 눈물 한 방울까지 내몰아냈다. 아직 잠이 덜 깬 눈이 천장을 헤매다 한참 멀리 있는 호숫가까지 거슬러 올라갔다. 뭔가에 홀린 듯 꿈에서까지 그 주변을 정처없이 걷고 있었다. 발에 뭐가 걸리든 관심도 주지 않고 완만한 물가를 따라서 맴돌 듯이 걸었다.

 뭔가를 두려워하면서. 그러면서도 온전히 달아나지도 못하고. 고작 절반도 가지 못하고 주저앉았다. 짙은 체념이 발목에 걸려 있었다. 호수 표면에 텅 빈 얼굴이 비치고 나서야 아르카비스는 깨닫는 것이다. 이건 꿈이구나. 호수에 비친 익숙한 얼굴이 담고 있는 검게 말라붙은 찌꺼기 같은 감정은 편린조차 알 수 없는 낯선 것이었으므로. 매일 밤 거울을 보듯 마주하고 있음에도 그러했다. 그러다 뒤에서 누군가 부르는 소리가 들릴 때면 내쫓기듯 꿈에서 깨어버렸다.

 —비스.

 깨고 나면 남는 것은 슬프다고도, 그립다고도 이름 붙이기 어려운 눈물과 어딘가 익숙하게 느껴지는 꿈 속 목소리의 잔향이었다. 아르카비스는 그것이 제가 아는 사람이 에쉬레스토 뿐이니 멋대로 머릿속에서 조합하는 모양이라 생각해 특별히 마음에 담아두지 않았다.

 “아르카비스.”

 꿈에서 들은 것보다 더 거리를 두려고 하는 듯한 목소리가 들렸다. 아르카비스는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 눈만 깜박였다. 돌아오는 대답이 없자 에쉬레스토가 더 가까이 그에게 다가왔다. 어쩌지. 지금은 틀림없이 눈이 붉어져 있을 것이다. 보게 되면, 걱정할 텐데. 아르카비스는 더 깊게 생각할 겨를 없이 베개에 얼굴을 푹 파묻었다. 숨이 막히도록 다정하게 보드라운 것이 숨 쉴 틈을 가로막았다.

 “아직 졸려요?”

 “…….”

 “너무 잠만 자도 안 돼요.”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에쉬레스토는 이불을 끌어 올려 살짝 드러난 아르카비스의 목 위까지 덮어주었다. 이따가 점심은 꼭 먹어요. 푹신하게 두드려 오는 손길을 느끼며 아르카비스는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쉴 뻔했다. 불쑥 치밀어오르는, 차라리 예전처럼 무시해줬으면 좋겠다는 날선 감정도 간신히 내리 누를 수 있었다. 이따금 제멋대로 치솟는 그런 감정들은 한 번도 제 것이라 생각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아르카비스는 에쉬레스토 발더가르트란 사람에 대해 잘 알지도 못했다. 그가 에쉬레스토에 의해 눈을 뜨게 된 날도 간신히 3달을 채우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런데도, 예전처럼이라니.

 “거짓말쟁이…….”

 아르카비스는 눈을 뜨고 처음 에쉬레스토를 마주한 때 느낀 감정을 또 다시 복기했다. 이미 누군가가 사용한 듯한 생활감에 찌든 방 한 켠에 놓인 침대에서 그는 처음으로 눈을 떴다. 그리고 가장 먼저 느낀 것은 명백한 죽음으로의 회귀였다. 숨조차 내쉬지 못해 혼란스러웠고 불확실한 환상과 착란에 시달려야 했다. 말하자면 천길 낭떠러지에서 떨어지기 직전의 철렁함이었다. 뇌리를 스쳐지나가는 당혹감은 꼭 이 순간이 오지 않길 바란 듯도 했다. 짙어져가는 불안감과 절망감이 막 가동하기 시작한 코어를 과부하시켰다. 물 밖으로 튀어 올라 숨 쉬기를 거부하는 물고기처럼. 그대로 세상에 태어나자마자 또 다시 깊은 무의식에 빠질 뻔한 아르카비스를 에쉬레스토가 어렵지 않게 건져냈다.

 ‘괜찮아요. 걱정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거니까.’

 물기에 이지러진 시트러스빛과 물색의 눈이 아르카비스를 사로잡았다. 눈 앞에서 흔들리는 하늘빛을 보고 아르카비스는 헉, 하고 간신히 첫 숨을 뱉어낼 수 있었다. 에쉬레스토는 아무것도 모르는 아르카비스를 끌어안고 연신 다독였다. 진정시키려 애썼다. 그러나 아르카비스는 그가 두서없이 늘어놓는 말들이 확실히 효과가 있음을 알아차렸다. 들썩이던 속이 언제 그랬냐는 듯 빠르게 가라앉았으므로.

 ‘나는, 이게……다 무슨, 일……?’

 ‘처음에는 다 그래요. 많이 혼란스럽겠지만 예측 가능한 범위니까 괜찮아요. 제가 도와줄게요.’

 놀라고, 당혹스러워서. 아르카비스는 제대로 된 판단을 할 수 없었다. 에쉬레스토는 그것이 단순히 자기가 미숙한 탓이라며 의체나 시스템에는 아무 문제가 없음을 보여주었다. 아르카비스 스스로 내부 진단을 한 결과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가장 처음 느꼈던 당혹감만은 떨쳐낼 수 없었다. 마치 눈을 뜬 순간부터 잘못이었던 것 같은. 땅 밑으로 쑥 끌려가는 것 같은 깊은 절망이.

 그러나 아르카비스는 이와 관련해서는 어쩐지 자기의 창조자이기도 한 에쉬레스토에게 한 마디도 꺼낼 수 없었다. 에쉬레스토 또한 모르지 않으면서 끝내 아르카비스에게 언질을 주는 일은 없었다. 별과 별이 공전하며 서로를 맴도는 것처럼. 가까이 다가가지도 못했지만 그러면서도 멀어지지도 못한 채 둘은 어색한 거리감을 두고 생활했다.

 언급하지 않아도 에쉬레스토 발더가르트도 아는, 아르카비스 브리제펠트가 걱정하는 일.

 단서는 언제나 문제의 옆에 있다고 한다. 아르카비스는 스스로의 안에서 답을 찾아내려 애썼다. 이를테면 예의 호숫가. 매일 밤 반복되는 꿈에 어김없이 등장하는 만큼 무언가 있을 것은 확실해 보였다. 막상 찾아가도 보이는 것은 속까지 시리게 보일 정도로 푸르른 표면에 비친 자기 얼굴 뿐이어도. 심지어는 너무 오래 거울을 들여다본 탓일까 그 얼굴이 자기 것이라는 확신조차 흐릿해졌다.

 가능한 일일까. 그럴지도 몰랐다. 어쩌면. 세상에는 이미 숱하게 복제품이 차고 넘치고 있었으니. 지금 아르카비스의 이전에 원본이 되는 아르카비스 브리제펠트가 있었다 한들, 이상한 일은 아닐 터였다. 그렇게 결론지으면서도 아르카비스는 어쩐지 입맛이 썼다. 몇 번이나 입을 헹구어도 쓴 맛이 가실 줄 몰랐다. 한동안 아무렇지도 않았던 진창 속의 질문이 스멀스멀 고개를 쳐들었다.

 이를테면 그가 만들어져야 하는 이유는 무엇이었는가, 같은.

 그것은 당연했다. 인공적인 존재들은 모두 만든 사람의 의도가 있음으로 만들어지는 것이니까. 그러나 에쉬레스토는 한 번도 아르카비스의 존재 의의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 둘러대는 말로 덮어놓고 아무런 문제도 없다는 듯 빠져나갔다. 애초에 그는 뭔가 말을 많이 하지도 않았다. 어디까지나 아르카비스의 의견을 존중해준다는 듯 물어보는 것이 다였다. 그러니까 꼭, 어디까지나 그저 사람 대 사람처럼. 아르카비스는 어떠한 종류의 존재 증명도 없이 그저 살아 숨쉬고만 있었다. 꼭 평범한 사람인 것 같이.

 맞지 않는 옷을 입은 것 같아 무척이나 어색하기 짝이 없었다.

 “오늘은 뭐하실 거에요?”

 이것 봐. 점심 식사가 차려진 식탁에 마주 앉아서도 태연하게 들려오는 말에 아르카비스는 미미하게 눈살을 찌푸렸다. 에쉬레스토에게도 악의가 없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렇다 한들 자기 얘기는 하나도 하지 않는 것은 미덥지가 못했다. 말하지 않음으로 이미 있는 것을 가리듯이. 과한 침묵은 때로는 눈에 띄는 표지가 될 수도 있었다. 그것을 모르지 않을 텐데, 에쉬레스토는 굳이 침묵을 택했다. 그리고서는 아르카비스에게 말을 걸어 못 본 척 하길 종용했다. 여전히 시선은 얼마 맞닿지 않고 떨어진 채로.

 거짓말쟁이. 대체 뭘 숨기는 건데.

 그 말 한 마디면 될 텐데. 그 말로 무너질 이 얄팍한 일상이 아쉬워서. 아르카비스는 이번에도 에쉬레스토의 의도에 따라 눈을 감는 것을 택했다. 어제 못 읽은 책 좀 읽으려고. 내키지 않는 대답과 함께 그는 아직은 조그마한 짜증을 실어 포크로 찍은 소시지를 나이프로 사정없이 뭉갰다. 끼익, 하고 나이프의 날이 접시를 날카롭게 스치고 나서야 아르카비스는 칼질을 그만 두었다. 껍질이 좀 질기네. 따위의 변명은 덤으로. 그러나 그는 자기가 모른 척 해주는 것처럼 에쉬레스토도 눈 감아 줄 것을 잘 알았다.

 “그러게요. 내일은 다른 걸 사와야겠어요.”

 먹기도 불편하고. 에쉬레스토는 아르카비스의 괜한 투정도 그 말이 맞다고 수긍해주었다. 꼭 어리광을 부린 꼴이라 아르카비스는 금세 기세를 수그러뜨렸다. 그 이후로는 식사 시간 내내 고요하기만 했다. 식기가 부딪치는 소리조차 나지 않았다. 그조차 아무 문제도 아니라는 듯 에쉬레스토는 먼저 말을 꺼내지도 않았다. 그나마 한다는 말도 다 먹은 식기는 내버려두어달라는 요청 뿐이었다. 마지막 남은 구운 토마토 한 알을 먹자마자 아르카비스는 거의 도망치듯 식탁가에서 벗어났다. 옅은 금빛을 잔상처럼 남기며 재빨리 물러나는 그 뒷모습을 에쉬레스토는 시선만으로 뒤쫓을 뿐이었다.

 “…….”

 기실 에쉬레스토에게도 아르카비스를 마주하는 일은 제법 큰 의지를 요구하는 일이었다. 그러니 곁에 두고도 어쩔 줄을 모르고 가까워질 것 같으면 나서서 거리를 두었다. 아르카비스가 답답해하는 것을 알고 있어도. 그저 그런 것이다, 라고 납득해주길 바라면서. 결국 또 다시 저만 생각하는 회피적 행동이었다. 이유도 말해주지 않고 불합리함을 참아달라 하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이미 위계 질서를 만들고 있었다. 그것은 ‘아르카비스 브리제펠트’ 에게 도움이 되는 일이 아니었다. 오히려…….

 “또 호수 보러 가려나.”

 책을 읽겠다던 사람이 현관문을 여는 소리가 거실 너머 식탁가에까지 들렸다. 어쩌면 책까지 들고 가는 건지도 모르겠다. 좀 이따가 도시락이라도 싸서 갖다 주어야 할까. 의미 없는 계획만 늘어놓던 에쉬레스토는 이제 아무 맛도 느껴지지 않는 샐러드를 한 조각 한 조각 포크로 찔러 입 안으로 밀어넣었다.

 

 

 아르카비스가 호숫가에 자주 가는 것은 별 다른 이유가 없었다. 다른 걸 다 놓더라도 에쉬레스토가 거주하는 집 주변에는 워낙 아무것도 없는 탓이었다. 가끔 집 안에 있는 것이 답답해질 때면 호수의 풍경이 떠오르곤 했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발걸음이 그리 향하고 있었다. 세상은 이 작은 상자같은 단편보다 더 넓고 다양하다는 것을 머리로는 알지만 아르카비스는 딱히 그것들이 갖고 싶은 생각은 들지 않았다.

 생각할 것도 없이 이상할 정도로 만사가 단조로웠다. 인적 드문 바닷가 끝자락에 위치한 단독주택. 그나마도 울타리 목적으로 키운 나무가 제법 울창해져서 숲처럼 우거진 사이를 빠져나와야 했다. 그리고 앞을 향해 한참을 걸어도 나오는 것은 너른 호수 뿐이었다. 바다만큼 탁 트인, 그러나 수평선 끝에서 암초로 가로막힌 인공 호수는 아르카비스에게 있어 세상의 끝이나 다름없었다. 그 이상의 것을 알 필요도, 넘볼 까닭도 없는 경계선. 주어지지 않은 것들에 미련을 가질 까닭도 없었다.

 —라고 생각하면서도.

 “…….”

 일부러 좋아하는 책을 골라 가지고 나왔는데도 아르카비스는 오늘따라 책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자꾸만 머릿속에 어른거리는 에쉬레스토의 얼굴 탓인 게 분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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