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6-18 00:25

 

하나는 그 자체로 완벽하고 온전하다. 그러나 혼자서는 품고있는 전능함을 누구도 알아줄 수 없었기에, 홀로 알고 있다는 것이 몹시나 고독하게 느껴졌다.

하여 홀로 완전한 존재는 제 형태를 분리해냈다. 조용하지만 과격한 그 행동에 오로지 하나만 존재한다는 순리가 무너져 혼돈이라는 공허가 생겨났다.

공허에는 어떤 의지도 담겨있지 않았다. 그것은 따지자면 본래의 순리로 돌려놓으려는 역반응으로 태어난 개념이었다.

기껏 해낸 일이 무효가 되기 전에 완벽했던 존재는 이윽고 남은 제 정신마저 둘로 갈랐다. 사방으로 퍼져 제 의지를 색색으로 물들여 전달할 수 있는 부분과, 그 색채 뒤에 가라앉는 부분으로.

빛이 생겨나 정체되어 있던 온전한 육신을 산산조각 냈다. 그것은 서로 비슷한, 그러나 저마다 전혀 다른 씨앗이 되었다. 곧 하나의 세계가 되어 하나의 차원을 구성할 파편들이었다.

그 무성한 파편들 틈 사이로 어둠이 한데 모여 가라앉았다. 어둠은 빛의 바로 뒤편에 머물지만, 결코 스스로의 의지로 움직일 수는 없었다.

빛과 어둠이 공허를 최대한 덮었다. 그럼에도 가끔 빈틈이란 것은 생기기 마련이었다. 위험에 노출된 채로, 조각들은 빛과 어둠을 받아들였다.

빛은 무수한 파장으로 파편들에게 각자의 의지를 전달했다. 파편 또한 저를 통과하는 빛을 흔들며 제 미약한 의지를 반사했다. 빛은 곧, 파편에 녹아든 생명의 의지대로 원하는대로 제각기 형상을 만들었다.

빛과 어둠은 동등하기에, 어둠 또한 빛을 흉내내어 그늘의 그을음이 되었다. 그러나 저마다 쪼개져 각각의 존재가 된 빛과 다르게 어둠은 아무리 나뉘어도 서로의 의식과 심상을 공유했다.

파편들이 뿌리를 뻗어나가는 것과 동시에 빛은 세계에 더 손을 뻗지 않았다. 빛이 머물지 않기에 어둠 또한 가만히 그들 뒤편에 녹아 머물렀다.

그리고 그들은 모든 생명들이 스러져 다시 하나가 되기 전까지 내놓을 결론을 기다리기로 결정했다.

하나의 고독이 만들어낸 다수의 결핍은 그럼에도 이전보다는 낫다고 말할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하나로 돌아가는 것이 옳은가?

 

 

본디 세상에 죽음은 존재하지 않았다. 태초의 것이 남긴 것은 영원하고 변하지 않을 실험장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간혹 세상과 세상 사이 공허를 맞닥뜨린 이들이 영영 낫지 않을 유혹에 빠져 죽음과 가까운 의사 불명 상태에 빠지는 일은 종종 생겼다.

공허의 유혹은 실로 대단해서 스스로에게 그 충동을 시험하는 자가 대부분이었지만 개중 어떤 이들은 그것을 남들에게 휘두르려는 생각도 갖게 되었다.

하여 죽음의 개념을 만들어내려는 시도가 생겼다. 공허를 닮은 그 개념이 생겨나 가장 먼저 한 일은 저를 만들어낸 이들을 하나로 합쳐버린 것이었다.

빛이 이 개념을 알아차린 것은 이미 죽음이 제가 태어난 세상을 절반 이상 파먹은 다음이었다.

제게 속하지 않은 개념에는 빛도 어둠도 손 댈 수 없었다. 그나마 가능한 것은 빛이 확산을 멈추게 하여 어둠이 이미 일그러진 파편을 집어 삼키는 것뿐이었다.

이미 모든 세상에 스며든 빛과 함께 어둠도 모든 세상에 스며들어 있었다.

하나의 파편에서 시작된 죽음의 개념은 그렇게 어둠에 녹아들어 모든 세상에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한 번 죽음에 대해 맞닥뜨렸을 때 그것에 저항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길게 사는 종족일수록 빠르게 굴복하며, 세상에 발을 딛게 하는 의지의 끈을 많이 쥔 자일수록 물리치기 쉽다고 알려져 있다.

 

 

빛은 불변하며 스스로를 바꾸지 않고 상대를 바꾼다. 한편 어둠은 타인에 흡수되기 쉽고 변형이 빠르다.

빛이 한가운데서 퍼져나갔으므로 외곽에 있던 조각은 상대적으로 빛의 영향을 덜 받을 수밖에 없었다.

바깥쪽에 위치할수록 조각들은 어둠의 영향을 받아 짧게 사는 대신 자기 자신은 물론이거니와 주변까지 변화시키며 한데 모여 사는 종족이 주를 이뤘다.

가운데에 위치할수록 조각들은 빛의 영향을 받아 길고 오래 사는 종족들이 주를 이루어 널리 흩어져 살면서 저마다의 영향력을 뻗쳤다.

신적 존재는 태초부터 존재하지 않았으나, 간혹 경외심을 살 정도의 강력한 존재는 신으로 대우받으며 그 추종자들에 의해 더 강해지기도 했다. 스스로를 신으로 칭하며 세를 불리는 것들은 인간성이 극심한 자들이었다.

어떤 조각이든 죽음은 어둠 속에 녹아든 채 평등하게 만물을 삼켰다.

모든 것이 균일하게 똑같을 필요는 없었기에 빛과 어둠은 이 불균형을 굳이 바로 잡을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보다 나은 결론을 위해서는 이 우연의 산물조차 나쁘지 않으리라.

 

 

조각들은 하나에서 뻗어나간 잎사귀와 마찬가지였으므로 다같이 비슷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같은 땅에서 키우는 식물이 일조량에 따라 저마다 크기와 모양이 달라지는 것처럼 사소한 차이는 있었다. 특히나 크고 작은 선택이 쌓이고 갈려 다른 가능성으로 쪼개져 분리되는 조각들도 생겨났다.

조각들이 품은 생명들 중에는 빛과 어둠 너머에 저와 비슷한 이들이 있다는 것을 알아채는 경우도 종종 생겼다.

미지의 영역에 대해 호기심이 생긴 이들은 조각 사이를 건너려 했다. 끝을 걷는 자가 아니라면 그 행위는 퍽 무모한 것이었다.

빛에 의한 왜곡으로 인해 어떤 이들은 자기자신의 과거를 돌아보거나, 미래를 일찍 맞닥뜨려야 했다. 간신히 어둠의 영역 너머로 건너가 다른 조각으로 건너는데 성공한 이들은 극소수였고, 그나마도 죽음의 개념과 마주친 경우에는 온전히 남지도 못했다.

그럼에도 꾸준한 시도 덕분에 가끔 어떤 조각과 조각들은 이어지기도 했다. 그 이어짐을 통해 무수한 인연의 가지를 본 빛과 어둠은 조각 사이를 억지로 떼어놓으려 들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생명은 나고 자란 조각에만 머물렀다. 조각마다 빛과 어둠의 영향력이 다른 탓이었다. 사소한 차이로도 어떤 생명은 아예 깃들지 못하거나 무너졌다. 혹은 사용가능하던 능력을 펼치지도 못했다.

무수한 시행착오가 있었다.

대개의 파편전이는 이적에도 이학에도 통달하지 못한 순수한 이가 성공하기 쉽다고 알려져 있으나, 이 또한 확실하지 않다.

 

 

조각들이 쪼개지고 서로 다른 분기로 분산되는 과정에서 기원도 출처도 불분명한 돌연변이 조각 또한 일부 생겨났다.

빛이 닿지도 않고 어둠이 스미지도 않은 이 조각들 속에서 자라는 것들은 보통 빛의 의지나 어둠의 그늘에 대해서도 알지 못했다. 작은 이적조차 일으키지 못하며 발전하는 이학조차 별것 아닌 수준에 그칠 때가 많았다. 그럼에도 서로 돕고 한편으로는 싸우고 갈등과 해결을 통해 자라나는 모습은 다른 조각과 다를 것이 없었다.

그럼에도 빛과 어둠은 그들에게서 나오지 않은 그 돌연변이를 껄끄러워했다. 어느쪽에도 환영받지 못하는 조각들은 때때로 생각도 못한 재앙에 맞닥뜨려 부서지기도 했다.

 

 

빛과 어둠은 태초의 존재가 육신을 버리고 태어난 만큼 다른 이의 눈에 보일 만큼 스스로의 형체를 갖추기 어려웠다.

여전히 홀로 있는 고독에 사로잡혀 있는 그들은 간신히 형체를 갖춘다 한들 알아주는 이가 없어 무너지기 쉬웠다.

빛의 의지나 어둠의 그늘은 곧잘 신적 존재로 떠받들어지기 쉬웠으나 그것이 본질적인 지칭은 아니었기에 그 격차가 크게 느껴지는 탓이었다.

그러나 어떻게 해도, 무수한 조각들 속 생명의 흐름을 본 이들은 그 틈에 끼어들고 싶다는 깊은 갈망을 떨쳐내기 어려웠다.

가장 쉬운 방법은 특정한 생명의 자리를 대체하는 것이었다. 빛이나 어둠이나 자신과 잘 맞는 그릇을 골라 깃들었다.

기존에 있던 생명은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으나 빛과 어둠에 맞닥뜨렸을 때 의식을 유지할 만큼 강력한 이가 아니면 보통은 빛의 의지와 어둠의 그늘 아래 잠들어 깨어나지 못했다.

그들은 한 번 입은 육체는 부서질 때까지 돌려 쓰고는 했다. 인연이 본래 그들 것이 아니었으므로 육신이 부서지면 좋았든 나빴든 저마다 알고 지낸 이들과 쌓은 인연이 전부 소실되기 때문이다. 정해진 인연과는 그리 합이 좋지 못했는데 이를테면 처음 육체를 입고 태어났을 때 가장 먼저 마주치게 되는 인연이라 할 수 있는 낳아준 이들과 마찰이 제일 심하다 알려져 있다.

빛이 깃든 이들은 서로의 존재를 크게 인식하지 못한다. 태생이 본질을 꿰뚫는 빛이어서, 그들은 공통적으로 만나는 이들의 과거와 그런 선택을 하게 만든 이유―가치관이나 사유를 궁금해 한다고 한다.

어둠이 깃든 이들은 서로의 자리를 의식했다. 그들은 다른 것에 녹아들어 이해를 주고받고 싶어하는 만큼, 그들은 만나는 이들마다 그들이 가진 가능성과 어떤 미래를 만들 것인지―결단과 의지를 궁금해 한다고 한다.

그들에게는 생명들 특유의 선악에 대한 개념이 모호했으나 제 주변의 이들은 유독 아끼고 살았다. 본질을 잊고 산다 한들 그런 천성이 변하지는 않았다고.

제 존재의의를 깨우치게 한 이들에게는 축복이라 할 것을 내려주기도 하였는데, 그것이 항상 생명에게는 좋다고 할 만한 것이 아니었으므로 어떤 이들에게는 지독한 저주나 다름없다 평했다. 그럼에도 스스로의 운을 시험하고 싶은 이들에게는 좋은 도전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신의 언어라고 최초에 알려진 것은 사실 빛의 의지가 생명들에게 각자의 의미로 받아들인 것을 들었다 여기는 것이다. 말에는 힘이 있다고 하고, 그 힘을 이해하는 것부터 마법의 시작이라 하나 그것이 누구에게나 이해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스스로에게 자신이 없는 이들일수록 이해하지 못했고, 섣불리 납득하기라도 하면 의지에 휩쓸려 소멸되기도 한다.

빛은 홀로 완전해지는 의지가 각각에게 스며있기에 형체를 입고 현현한 때조차 서로를 찾지도, 느낄 필요도 알지 못하고 다만 자기가 품은 의지를 주변에 흩뿌리기만 했다. 하여 빛의 의지에는 자기가 부딪친 대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힘이 있고, 그것을 듣고 이해할 수 있는 이는 빛의 의지를 조금이라도 움직일 수 있는 자격이 있다는 뜻이 되었다. 따라서 한때 빛과 가장 가까워지는 조건으로 혼자 완전해져 고독과 친숙한 것이 가장 좋다 여겨지던 때도 있었으나 그것은 그리 상관없는 것으로 밝혀졌다.

빛에 가까운 종족들은 대체로 저들끼리 사용하는 언어가 발달해 의사소통에 능숙했다. 서로의 의지를 비추며 관철하며 쌓아올린 기반에 각자가 다룰 수 있는 고유의 빛의 의지를 섞어 만들어내는 주문이 곧 이적의 발현 조건이 되었다. 규모에 상관없이, 하나이기 싫어 여럿이 쪼개진 빛의 특성을 고스란히 닮아 혼자서 일으키는 이적은 반드시 여럿의 뜻을 모아 발현한 이적보다 현저히 격이 떨어진다. 또한 빛의 의지는 감정을 극한으로 소모하므로 대규모의 이적을 실현하고 난 후유증을 심하게 겪어 성격이 바뀌는 경우도 많다.

흔히 커다란 효과를 내려는 이적은 준비시간도 길고 필요한 것도 많다 생각되지만 오히려 간단한 것이 더 큰 효과를 내기도 한다. 빛의 의지 자체가 대부분 명령어 체계의 짧은 구조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때문에 원소에 가까운 말을 듣는 이들은 각 속성에 맞는 주문을, 형태 변환에 가까운 말을 듣는 이들은 변화 주문을, 동사에 가까운 말을 듣는 이들은 각각에 적합한 주문을 만들어낸다.

현존하는 대마법사라 함은, 딱히 다른 이들을 바로 모아놓지 않아도 이미 수많은 이들의 무의식 속에서 자기를 빛나게 만들어 상시 일으키는 이적이 누구보다 강력한 자를 일컫는다. 또한 감정 관리에도 철저해 이적을 사용한 전후로 그리 차이가 크지 않는 인물상이기도 하다. 마법을 효율적으로 쓰기 위해서는 어떤 언어든 달변의 대가 수준으로 모든 이들과 의사소통이 원활하게끔 스스로를 갈고 닦아야 한다.

빛이 닿기만 한다면, 어떤 조각에서든 빛의 의지를 듣고 실현하는 마법이 존재하게 된다.

 

 

빛에 영향을 많이 받은 종족일수록 빛이 흩뿌린 입자를 다루는데 어려움이 없었다. 빛의 의지를 다루는 것은 만물을 관통하는 의지를 다룬다는 것으로 이들은 쉬이 이적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빛에 익숙해도 다루는 것에는 미숙한 이들은 그들끼리 모여 이적을 이학(理學)의 개념으로 분석하고 낱낱이 분해한 다음 새로 그들만의 방식으로 만들어 구현해냈다.

과정을 구축하는 것은 가장 오래 걸리지만 한 번 틀을 잡아놓으면 결과값을 추출해내는 것은 마법보다도 더 빠르게 이루어낼 수 있다. 가장 뛰어난 기술이라 평가받기 위해서는 누가 사용해도 결과는 항상 동일한 출력을 유지할 수 있는가에 따라 달려있다. 감정을 소모하는 것은 이적과 똑같으나 실행할 때마다 소모하는 양은 정해져 있으므로 무리해서 사용하지 않는 것이 좋다.

칭송받는 대기술자는 타고난 의지로 모든 설계와 제작 과정을 추진할 수 있어야 한다. 그들의 의지는 항상 다른 이들에게 변화를 이끌어내고, 가야할 길을 앞장서 나가기에 자연히 많은 사람이 모여들었다.

이적과 이학은 상호 간에 호환은 되지 않아도 결과물은 비슷했으므로 뛰어난 이들은 서로의 것을 견제하며 각자의 유산을 진심으로 아꼈다.

어찌보면 서로를 발전시키는데 더욱 필요한 것은 경쟁 의식인지도 모른다.

 

 

어둠에게 개별적인 의지는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빛이 있는 곳에 뭉쳐다니는 그들 특성이기도 했다. 어찌어찌 형체를 입고 나뉘어 다녀도 본능적으로 서로의 의식을 느끼지 못한 채 홀로 있는 것을 견디지 못했다. 죽음의 개념을 품고 있는 까닭에 빛과 달리 그들은 현상에 미칠 수 있는 영향력이나 존재감이 극단적으로 떨어지기도 했다.

이같은 특성은 그들의 영향을 짙게 받아 태어나는 것들에게도 곧잘 나타나곤 했다. 하여 어둠과 가까운 종족은 보통 자기의 모습을 특정하게 구현하지 못하거나, 자주 바뀌거나, 혹은 아예 안개나 물처럼 다니는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이들은 개체 간 경계가 흐릿한 대신 어둠의 그늘에 익숙하여 의사소통 없이 연결된 정신을 통해 서로의 의사를 전달하는데 막힘이 없었다. 점차 그들은 서로를 파악하거나 소통하는 과정에 그리 미련을 두지 않았다. 그보다는 서로 쌓아올린 기억을 중시했다.

이따금 쌓아온 기억이 무거워 견딜 수 없을 때 이들은 기억을 폭발시키기도 하는데, 품었던 감정이 얼마나 깊은가에 따라 그 폭발력이 달랐다. 중하게 여기던 것이면 산을 무너뜨릴 정도도 되었다. 때문에 섣불리 몬스터 토벌이라며 곳곳의 터전을 정복당한 이들은 각자의 절망을 폭발시키며 동귀어진하는 것으로 지도를 바꿔버릴 만한 역사를 남겼다.

문제는 이 폭발 여파의 다음으로, 폭발은 예상 외의 전혀 듣도 보도 못한 부산물을 남겼다. 어떤 생명도 발디딜 수 없는 썩어가는 땅으로 문드러지게 하는 검댕이 남기도 하고, 어떤 계통에도 맞지 않는 괴수가 태어나기도 했다. 말과 의사가 통하는 환수종들 외의 괴수종은 대개 그런 식으로 태어났으며 이들은 딱히 생식도 하지 않아 단일종으로 생을 마감하기도 했다. 학자들의 의견은 이들이 살아있긴 한 것인지, 숨을 쉬는 것인지조차 불분명하다고.

이 같은 현상은 어둠이 영향을 미치는 조각들이라면 어디에서든 나타날 수 있다. 의사소통이 가능한 종족이더라도 무리에서 떨어져 빛에도 의존하지 못해 고독함을 겪는 이들이 가장 어둠에 휩쓸리기 쉽다고 알려져 있기도 하다.

간혹 흑마법이라 하는 것이 세간에 떠돌 때가 있는데 그것은 이들이 사용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기본적으로 이적을 다룰 수 있어야 하기 때문에 불가능하다.

 

 

빛의 속도는 일정하지만 이따금은 빛의 속도보다 더 빨리 허물어지는 조각이 생겨났다.

최후의 한 생명이 남게되면 조각은 그 생명을 뱉어내고, 생명은 빛과 어둠 앞에 제가 봐온 세계의 결말을 내놓아야 한다. 결론의 증언은 당장 내릴 수도, 유보할 수도 있다.

태초의 의문 앞에 내놓아진 각자의 결말은 긍정이 절반, 부정이 절반인 듯하다.

끝을 걷는 자의 다음이 어떻게 되는지는 스스로의 결정에 달려있다. 대체로 결론을 내는 것과 함께 소멸, 또는 과거 회귀, 혹은 파편전이 세 가지로 나뉜다.

 

생각나는대로 설정 넣기…좀 뭐랄까 한데 묶인 느낌 나게 써야 하는 거 아닌가? 이건 너무 설정 놀음 나열인데 ㅠㅜ

세계관 어떻게 짜는 거지 어렵다……끼야악 이름도 짜야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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