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놈의 제발, 제발 한번만. 레일린은 있는 대로 인상을 구겼다. 별 일 없을 것을 가끔 그의 집사장은 그럼에도 시찰 한 번만 나가달라고 성화였다. 주인이 자주 가지 않는 티를 내봐야 좋을 거 없다는 게 그 이유였다. 가주 승계도 저 귀찮은 거 줄이자고 받은 판국에 레일린이 신경 쓰고 싶을 턱이 조금도 없었다.

 “대체 가서 뭘 하라고?”

 “해야 할 일을 하셔야죠.”

 “여기서 하면 되잖아.”

 “안 됩니다.”

 눈 좀 새파랗게 뜨면 쫄아붙던 것이 점점 겁을 상실하는지 말대꾸를 해댔다. 익숙해지면 내성이 쌓인다더니 새로 교육을 해줘야 하나? 레일린은 언짢은 표정으로 집사장을 내려다보았다. 그의 껑충한 키에 빗대면 엔간한 이들은 눈 아래에 위치하곤 했는데, 이 집사장은 이때만큼은 눈치 좋게 고개를 푹 수그리고 있었다. 마음에 안 들어. 레일린은 목이 갑갑해질 정도로 차오르는 답답함에 찡그린 얼굴을 펴질 않았다. 눈앞의 이가 이전 가주 때부터 있었다는 사실까지 떠올랐으나, 순전히 괜한 짜증이었다. 도시 바깥의 사유지까지는 마차를 타고도 한나절 이상을 가야 할 정도라 해도 주기적으로 본인이 확인해야 한다는 것 또한 틀린 말은 아니었다.

 “……알아서들 해라.”

 레일린은 이동에 필요한 물자나 짐을 꾸리는 것에까지 손대고 싶지 않았다. 그걸 바란 적도 없다는 듯이 집사장이 짧게 목례 후에 그의 앞을 떠났다. 이윽고 그의 개인 소지품을 챙기기 위해 다른 시종들이 제 방에 들어왔을 때, 레일린은 잠깐 제 선택을 물릴 것과 집사장의 교체를 심각하게 고려했으나 그 또한 오래 가지는 않았다.

 짐짝 중 하나처럼―전적으로 본인의 의사만 반영된 표현이다―마차에 실려가는 중에 본 바깥 풍경은 언제나처럼 삼삼하기 그지없었다. 괜히 제 빨간 머리카락을 배배 꼬는 손장난을 치다가, 부러 창밖을 살피던 보랏빛 눈이 다시금 칙칙하게 가라앉는다. 도시 바깥이 늘 그렇지. 알면서도 달래지지 않는 지루함은 언제나 제 속에 머무르던 허무함과 비슷한 크기였다. 딱히 레일린이 무언가를 원하는 것도 아님에도 그러했다. 차라리 누구든 여럿 죽어나는 사건이라도 일어나길 바라며, 그는 몹시도 따분한 시간을 견뎠다.

 ―기대는 항상 어긋나기 마련이라, 수행 마차는 아무 문제없이 목적지에 도달했다.

 그늘지게 한 마차의 벽에 기대어 어느새 졸고 있던 레일린은 마차의 흐름이 서서히 멈추는 것과 동시에 눈을 떴다. 창밖에는 익숙한 그의 사유지 속 저택이 멀리서 보였고, 앞서 먼저 도착한 짐마차에서는 짐을 내리고 있기도 했다. 또 다른 따분함. 위치만 바뀐 것으로는 환경은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여기서도 그저 그는 얼굴만 비추고, 보고 있지 않아도 보고 있다는 것을 각인시켜주면 할 일이 끝날 게 뻔했다.

이래서 높은 자리란. 정해진 일만 천편일률적으로 수행하는 데에 레일린은 진절머리가 났다. 어차피 그가 있든 없든, 해야 할 일을 하지 못할 것들이면 갈아치워지는 것이 옳았다. 그리고 그 과정에 그가 직접 개입할 이유는 없었다. 아랫것들 일에 윗전이 일일이 간섭할 까닭은 없었으므로. 하여 레일린은 아무도 없는 틈을 타서, 본래 있어야 할 자리를 이탈했다. 어차피 한두 번 있던 일도 아니니, 잠깐의 사소한 소동 정도야 있어도 그만일 것이다.

 갈 곳이 많은 것도 아니고, 저택 담을 넘어 둘러싸는 바깥 사유지는 널따란 밭이 푸르게 이어진 게 전부여서. 레일린은 적당히 담과 밭의 구획을 나눠놓은 울타리 사이에 앉았다. 흙먼지 정도는 조금 감안할 정도는 되었다. 울타리라고는 하지만 그마저도 실용적으로 짓느라 실은 띄엄띄엄 나무들이 일렬로 세워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갖가지 오밀조밀한 과실들이 매달린 나무들은 바람이 일 때마다 솨아―, 하고 이파리와 이파리가 부대끼는 소리를 파도처럼 흘렸다.

아, 이대로 조용히 빌어먹을 시간이 죄다 흘렀으면. 하고 무심결에 생각할 즈음에.

 “저…….”

 갑작스럽게 귀에 닿는 소음에 레일린은 자연히 눈을 찡그렸다. 어떤 놈이 허락도 없이 먼저 말을 걸었지? 겁을 상실한 놈에게는 본때를 보여주겠다고 벼르면서 시선을 돌린 순간에. 그는 시야에 잡힌 상대를 보고 조금 놀랐다. 외형이나 생김새 이전에 느껴지고는 하는 마력의 파장이 몹시도 희박한 것을 알아버린 탓에.

 “길을, 잃었어?”

 제 딴에는 무려 걱정씩이나 한 모양이다. 레일린은 건너편 나무 뒤에 조심스레 숨은 상대로부터 눈을 떼고, 나뭇잎의 숫자라도 세듯 시선을 위로 올렸다. 이걸 못 본 척을 해야 하나. 아니면 꺼지라고 해야 하나. 당연히 그가 그의 구역 내에서 길을 잃을 확률은 한없이 0에 가까웠다. 그저 이쪽이 대답을 하지 않았을 뿐인 것을, 저쪽에서는 무슨 의미로 받아들인 것인지 뜻 모를 상대는 점점 거리를 좁히며 다가왔다. 이윽고는 성큼 레일린의 위로 그림자를 드리우는 가지 아래까지 도달했다.

 “길을 헤매다 지친 건가 했어.”

 굳이 따진다 하면 마차 타는 시간이 지루해서 지쳤다고 해야겠지만. 레일린은 딱히 상대의 말을 부정하거나, 긍정하지도 않았다. 분명 이 일람도 아닌 낯선 이하고는 얽히지 않는 것이 어느 쪽이든 이로울 터였다. 그러나 상당히 저들 사이에서도 눈치가 없을 게 분명한 그는 좀처럼 레일린의 앞에서 떠날 생각이 없어보였다. 적당히 봐줄 때 알아서 눈치껏 꺼져버리면 좋으련만. 짧게 자른 하얀 머리를 위로 질끈 묶은, 덩치만 컸지 실로 어려보이기만 하는 남자는 연신 레일린의 안색을 살피는 듯 머뭇머뭇 말을 붙여왔다.

 “배고파서 그래?”

 “…….”

 “아. 나 가지고 있는 게 별로 없는데. 아니면 안 들키게 과일 따먹어도 되겠다!”

 남자는 코앞의 나무가 제 것인 양 제안을 해왔다. 레일린은 딱히 배가 고픈 것도 아니었으므로 고개만 내저었다. 이상하게도, 상대는 그것이 꽤나 아쉬워보였다. 자기 것도 아니면서 정말 왜 선심을 쓰고 있지. 레일린은 눈앞의 남자가 조금 우스워졌다. 이유는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을 것 같기도 했다. 명백한 호의가 엿보이는 무엇도 숨기지 못하는 까만 눈. 일면식도 없는 상대에게도 품는 호의. 조심스러운 태도와 행동. 끝이 조금 갈라지는 목소리 발성과 억양. 전부 다 레일린이 입을 열기 전까지 그의 속을 알지 못하는 어리석은 치들이 내비치던 비굴한 모습과 크게 다를 것이 없었다. 그리고 그는 그 속에 든 것이 가식인지 진심인지 일일이 가를 필요를 느낀 적이 한 번도, 전혀 없었다.

 “어. 가봐야 될 시간이다. 혹시 길을 못 찾고 있는 거라면 같이 갈래?”

 “…….”

애를 쓰는군. 레일린은 이쯤 되면 정말 스스로가 생각하기에도 많이 참아줬다고 생각했다. 다른 놈들이었으면 벌써 질질 짜게 만들어서 퇴장시켰을 텐데. 나이를 그도 먹기는 한 건지. 예전보다 물러진 스스로를 돌아본 그는 픽 웃고 말았다. 그걸 또 어떻게 오해한 건지, 레일린은 남자의 귀 끝이 미미하게 붉어지는 것을 보았다. 처음보는 사이임에도, 저 치에겐 참 어울리지 않는 색깔이라고, 무심코 생각해버렸다.

 기왕에 부린 변덕. 한 번쯤 더 부린다고 더하고 덜할 것이 없을 듯하여.

 “이곳에서 내가 모르는 곳은 없으니, 너나 급한 일 있으면 얼른 가라.”

 딱히 거짓말은 아닌 소리를 꺼냈다. 거진 패를 다 까서 보여준 거나 다름없는데도, 상대는 조금도 눈치채는 것이 없는지 어리숙하게도 레일린에게 거듭 확답을 받으려 들었다. 괜히 대답했나. 성가시고 번거로워서 레일린은 아예 손을 휘휘 내젓는 것으로 축객령을 내렸다. 급하다면서 한가롭게 처음 본 사람에게까지 신경을 쓴다니. 우스워서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렇게 앞으로 영영 모를 상대를 치우고 나니 비로소 익숙한 환경이 그를 덮쳤다.

 “가주님! 또 이러시기입니까!”

 “조용히. 누가 보면 내가 내 할 일도 안하고 다니는 줄 알겠어.”

 “왜 아니겠습니까!”

 그거 잠깐 자리 비웠다고 가문이 당장 무너지기라도 하는 듯한 태도였다. 레일린은 이 잠깐의 일탈도 여기서 확실히 끝났음을 확신하고 몸을 일으켰다. 옷에 붙은 흙을 탁탁 털어내던 그는 잠깐 뭔가 잊은 게 있다는 듯 집사장을 불러 세웠다.

 “경비 담당이 누구지?”

 “지금은 아마 여기서 반대편 방향을 순찰하고 있을 겁니다.”

 “아하. 그래?”

걔는 맡은 일 똑바로 하라고 그래. 다음날에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 의미심장한 경고를 남기는 입과 다르게 눈은 샐쭉하게 휘어있었다. 많은 말을 필요로 하지 않는 이를 주인으로 모시는 만큼, 집사장은 무언의 긍정을 담아 고개를 꾸벅 숙였다. 그 대답과 함께 레일린은 이제야 겨우 제 본분을 다 하는 모습으로 돌아섰다.

 어쩌면 뭔가 흥미로운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고, 그런 예감이 레일린의 발걸음을 가볍게 했다.

 

 

 

진짜로 그냥 어쩌다보니 나온 얘긴데 제법 얘기가 진전되는 게 흥미로워서 이거도 써버림.

맛있음.

린이 먼저 사유지에 도착해서 일이 터지기 전부터 니아와 눈도장을 찍었고, 니아가 여전히 린의 외모에는 호감을 품었을 때 어떤 변화가 생기는가, 같은.

문제는 내가 배경 설정 이해 못한 게 있으면 다시 갈아엎어야 할 수가 잇….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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