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하누스] 처음에는

 흘러가는 강물조차 그대로 굳어버릴 것 같은, 나른한 공기가 사방을 좀먹는 화려하고도 권태로운 실내 안에서. 기나긴 침실 로브만을 둘러입은 레일린이 한가롭게 침대에 모로 드러누워있었다. 침대 위를 한 바퀴 돌 적마다 하얀 옷자락과 치렁치렁하게 늘어뜨린 붉은 머리카락이 나풀거리며 휘날렸다. 새하얀 옷과 대조되는 짙은 피부색의 다리는 연신 까닥이며 허공을 갈랐고, 손은 침대 옆 협탁 위에 둔 그릇을 향해 시계추마냥 느릿느릿 반복적으로 움직이며 한입에 먹기 좋게 썰린 과일을 하나씩 입에 넣고 있었다. 아삭하게 씹히는 사과와, 살짝 터뜨리기만 해도 과즙이 줄줄 새어나오는 포도 사이를 오가던 손끝이 이내 그릇의 바닥을 짚었다. 그릇이 비어가는 까닭은 부지런히 제가 입을 놀렸기 때문인 것을 알면서도, 그는 이 방에 처음 들이닥치는 게 누구든 그 사람은 이 끈적이는 과즙이 고인 그릇을 머리로 뒤집어 쓰게 만들어주겠다고 마음 먹었다.

 그렇게 자세 하나 바꾸지 않고 태만하게 재앙을 향해 걸어들어올 이를 기다리며 과즙이 잔뜩 묻은 손가락을 날름 핥던 레일린은 생각보다 바깥이 소란스럽다는 것을 늦게서야 알아차렸다.

 하여 그는 시종 하나가 부리나케 침대 앞까지 뛰어들어와도 그리 짜증을 내지 않을 수도 있었다.

 “위대하신 라나시아의 일람을 뵙습니다.”

 “인사치레는 됐으니까 무슨 소동인지나 말해 봐.”

 지금은 싫증내는 그 ‘인사치레’ 조차 하지 않으면 죄다 ‘적당한 처벌’ 을 내렸다는 것은 새까맣게 잊은 레일린이 손을 팔랑팔랑 흔들었다. 할 말이 있어도 내뱉을 입은 없는 시종은 내내 침대 바로 앞 바닥을 향해 처박은 고개를 한없이 더 떨어뜨릴 뿐이었다.저, 그, 그것이……. 따위를 주워섬기며 어물쩍거리는 시종을 본 레일린은 그새를 못 참고 하던 버릇대로 일렁거리는 짜증을 굳이 숨기려 들지 않았다. 경고성을 담아 넓게 편 손으로 시종의 뒷머리를 쓰다듬는 그대로 그가 나직하게 대꾸했다.

 “짧고. 간략하게. 이게 그렇게 어렵나?”

 “그게, 지금 바깥 사유지에 침입자가 잡혀들어왔다 하여!”

 “허?”

그게 뭐. 하루 이틀인가. 레일린은 남의 일처럼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도시 밖 사유지는 본래라면 그리 레일린의 관심을 끌지 못했다. 어차피 그가 나서야만 해결될 일도 별로 없었거니와 일부러 오가기에는 상당히 거리가 있어 매우 귀찮은 탓이었다. 그런 이유로 이따금 침입자가 발생한다는 소식은 들어오더라도 레일린이 직접 개입한 적은 여태 한 번도 없었다. 영 관심없어 하던 레일린의 고개가 갑작스레 다른 방향으로 홱 올라갔다. 분명 침입 정도는 그 전에도 꽤 자주 일어나는 일이었고, 이정도로 그의 시종들까지 유난을 떨 만한 것도 아니었다. 침입했다 해봐야 간 큰 이데르 놈들일테고. 대개 그것들은 즉결처분으로 끝났다. 그 새삼스러운 일이 이제와서 갑자기 바뀔 리도 없고. 레일린은 잡고 있던 시종의 머리채를 탈탈 털듯 이리저리 흔들었다.

 “그 정도로, 왜, 호들갑이야.”

 “예 그것이! 그 무지렁이들 중에 윽! 주인님을 꼭 뵈어야겠다고 성화인 놈이 있는지라!”

 “뭐라고?”

 끝내 시종의 입에서 튀어나온 생각지도 못한 말에 레일린이 헛웃음을 지었다. 어떤 놈이 누구더러 오라가라 헛소리를. 그로서는 당연하게도, 그 침입자들 가운데 일면식이라도 있을 놈은 하나도 없을 거라 자신할 수 있었다. 그런데 말하는 걸 듣자니 그 건방진 놈은 정확하게 레일린을 지목했다고 했다. 그의 길다란 붉은 머리카락과 마법을 구사할 때 생기는 눈의 반응을 특징으로. 과연. 이쯤하니 레일린으로서도 상당히 흥미가 동하기 시작했다. 어떤 미친놈인지는 몰라도 소원이라니 그 눈에 얼굴 한 번 비춰주고, 소원 성취까지 하게 도왔으니 죽여버릴까.

 “그럼 준비를 해야지.”

 레일린이 산뜻하게 말했다. 예? 갑자기요? 시종이 멍청하게 되물었음에도 레일린은 화사한 웃음을 거두지 않았다. 나 보고 싶은 새끼가 있다며? 태평하기만 한 말에 대번에 시종의 안색이 푸르죽죽해졌다. 현장에 한 번도 안 나가본 사람이 거길 가서 뭐하려고. 그러다가 괜히 그것들이 귀한 몸에 상처라도 내면! 아랫것들이 어찌 당황하든 레일린은 주변을 닦달해 본인의 환복을 위해 옷을 가져오라 명령을 내렸다. 늘 입던 가벼운 옷차림에 장신구까지 착용을 마치고, 레일린은 속편하게 저를 찾는다는 머저리를 위한 걸음을 옮겼다.

 

 

 레일린이 도시 바깥 사유지에 다다른 순간마저도 그의 저택 주변은 어수선하기 그지없었다. 멀리서도 확연히 보이는 커다란 철창이 여럿, 그 앞을 감시하는 사람도 여럿. 개중 한 철창이 유난히도 시끄러웠다. 그 소음이 어쩐지 한걸음 한걸음 가까이 다가갈수록 심해지는 것이 착각은 아닐 것 같았다. 레일린은 사납게 철창 문을 흔드는 한 이데르 앞에 섰다. 행동거지만 영 사납다 뿐이지 저보다 머리 하나는 작은, 상상보다 훨씬 어려보이는 인상이었다. 흔해빠진 하얀 머리는 짧게 쳐내 묶고 있었는데, 한창 굴렀는지 흙먼지가 더께더께 앉아 잿빛으로 보일 정도였다. 입은 것은 한눈에 보기에도 낡은 옷. 그 넝마같은 천이 감싸고 있는 덩치는 그가 본 중에 제일 두터운 것이, 곰이라 해도 이상할 게 없을 정도였다. 레일린은 철창을 꽉 쥔 솥뚜껑같은 손을 바라보았다. 상황과 전혀 동떨어져있지만, 우습게도 어쩌면 거의 제 머리만할 것 같다는 추측이 떠올랐다.

 어찌되었건, 그가 알지 못하는 놈이라는 사실은 변함없었다.

 “***********!!”

 한참 놈의 면상을 구경하고 있으려니 웬걸, 레일린은 갑자기 짐승이 우짖는 듯한 소리를 들었다. 표정으로 미루어보건대, 그리 썩 좋은 말은 아닐 것이 분명했다. 저들 식의 욕설이겠거니. 그렇게 어림짐작할 즈음에 그는 선명한 악의를 감지했다. 레일린에게 타인의 감정은 물에 손을 담가 휘젓는 것보다 더 분명한 질감으로 다가오는 것이었다. 하여 어렵지 않게 고개를 옆으로 돌리자마자 철창 사이로 내뻗어진 주먹이 가까이 스쳤다. 이 조그만 소동에 주변의 소란이 한층 크게 번졌다. 어수선해지는 것이 더 번거로워서 레일린이 조용히 하라는 뜻으로 달려오는 경비 인원에게 손을 팔랑팔랑 흔들었다. 시선은 곧게 눈앞의 이데르에게 고정한 채로.

 “너. 날 아나?”

 질문 하나만 했을 뿐인데도 반응은 심상찮게 거셌다. 레일린은 또 다시 알아듣지 못할 욕설들을 귀따갑게 들어야 했다. 그 사이로 띄엄띄엄 들리는 단어를 간신히 주워들을 수 있을 뿐이었다. 너 때문에, 우리들은……. 선연한 분노를 내뱉는 입술이 파르르 떨리는 것을 레일린은 놓치지 않았다. 오로지 분노때문이라기에는, 감정을 다 갈무리하지 못하는 까만 눈은 분명 여러 갈래를 섞어 품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을 자세히 알아보기에는 상대가 영 좋지 않았다. 자기 하고 싶은 말만 하고, 그나마도 표현이 지리멸렬하기 짝이 없는데다. 그렇다 하여 레일린은 괜히 시간 낭비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그는 말이 통하지 않는 상대에게 원하는 것을 얻어내기 위해 굳이 말로 달랠 필요가 없는 사람이었다.

 레일린은 가볍게 마력을 끌어올렸다. 보랏빛의 눈이 어두운 녹빛으로 가라앉자 무엇때문인가 세차게 분노만 내뿜던 이데르의 태도가 달라졌다. 그 이유는……금방 그의 머릿속으로 스며들었다.

확실히 날 알고 있어. 레일린은 타인의 시점으로 기록된 제 뒷모습을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었다. 어떤 동굴 입구에서. 그는 피칠을 하고 널려 있는 시체 사이에서 더 선명하게 붉은 모습으로 서 있었다. 그런 그의 앞에는 무릎 꿇은 누군가가 있어서. 그는 무릎 꿇은 이의 머리 위에 손을 얹고 있었다. 눈동자 색으로 미루어보아 마법을 걸고 있는 것 같았다. ■■■■……. 기억 속에 녹아 있는 단어는 명확한 음절 없이 흐릿하기만 했다. 유감이라면 유감스럽게도 그 이름을 빼앗아 지웠을 레일린 본인도 더는 기억하고 있지 않으니 이 이데르라고 알 수 있을 리가 없었다. 하여 오롯하게 그만이 기록되어 있는 기억에는 풀 길 없는 증오만이 선명했다. 갑작스러운 가족과 친구들의 죽음. 빼앗긴 물자와 식량들. 쫓겨다니며 받은 핍박 속에서 이 이데르는 턱없이 불가능한 일을 꾸몄다. 하여 그가 여기까지 쳐들어 온 이유라고는 오직 레일린 그 하나 뿐이었다.

 도무지 알아들어먹을 수 없는 사나운 말이 다시 한 번 날아들었다. 이쪽이 저를 엿보고 있다는 걸 알아차린 듯 했다.

 “접견 신청은 좀 더 온건한 방식을 택하는 게 좋았을 텐데.”

그리고. 죽인 놈은 따로 있고 나는 이름 몇 개만 빼앗았을 뿐인데 왜 욕은 내가 전부 먹고 있는거지? 레일린은 진심으로 그렇게 여겼다. 아무튼, 어딘가에는 살아있겠지. 아니면 버려졌든가. 퍽 무책임한 소리에 철창이 사납게 흔들렸다. 하지만 레일린으로서도 딱히 해줄 수 있는 것이 없었다. 흘러들어온 이데르의 처우에 대해서는 그 대단하신 기록자조차 보존해둘 가치를 느끼지 않을 것인데. 그렇다고 저걸 도시 안으로 데려가서 그것들을 굳이 찾아줄 까닭도 없고.

아니지. 레일린은 방금 스스로 떠올린 생각에 끌리고 있는 자신을 보았다. 사납게 우짖는 저걸 소유한다는 것까지만, 딱 그랬다. 하나를 정하고 나니 이유도 우후죽순으로 샘솟았다. 옆에 두면 한동안 심심하지도 않을 것 같고, 팔팔하고, 생긴 것도 특이하고……. 충동적으로 결정을 내리자 행동은 자연히 빨라졌다.

 “한동안 여기 머무를 거니까. 여기 있는 지저분한 거 싹 다 치워.”

 “예?”

 “귀 먹었어? 얘 빼고 다 치우라고.”

 갑작스러운 레일린의 명령에 뻣뻣하게 굳어있던 인원이 일사분란하게 움직였다. 일단 이건 됐고. 다음. 레일린의 시선이 철창 안의 이데르에게 향했다. 그는 아직 눈앞에 닥친 현실이 영 믿기지 않는 듯 했다. 레일린은 여태 답답하게 굴고, 말귀를 한 번에 못 알아먹는 멍청한 것들은 질색이었으나 이 얼뜨기같은 놈의 얼굴은 나쁘지 않은지도 모른다고, 얼핏 그런 생각을 했다. 그는 보통 제 소유의 것들에게는 조금쯤은 허용 범위를 넓혀주기는 했다. 그렇다고 지금 벌써 버릇을 잘못 들이면 안 될 텐데. 제가 떠올린 생각을 제3자의 시선으로 보자니 영 우습기 짝이 없었다. 킥킥 웃던 그는 어느새 멀어지는 제 동료를 향해 괴성을 지르며 창살을 향해 돌진할 듯 몸을 내던지는 이데르에게 손을 뻗었다.

 그에게는 운 좋게도, 저 치에게는 불운하게도. 아까 엿본 기억에는 잘 들리지 않은 이름과 함께 명백하게 잘 들린 이름도 같이 섞여 있었다.

 이름을 감추려는 이의 입을 직접 움직여, 스스로 이름을 밝히는 것과 똑같은 상황을 만드는 것 또한. 무척이나 손 쉬운 일이었다.

 “기뻐해.”

너 혼자라도 선택 받아서 살아남았으니. 레일린은 하찮은 태생만큼이나 별 대단찮은 뜻을 가지고 있을, 특별할 것 없는 이름을 입에 맴돌게 하며 말했다. 재수없으면 태어나자마자 죽을 수도 있는 약한 것들. 이 이름도 다른 것들처럼 질기게 오래 살 뿐인 별것 아닌 것을 지칭하는 단어일지도. 그런 것으로 조금이라도 오래 살길 기원하면서. 우스운 짓거리였다. 어차피 이들은 이곳에 발을 디딘 시점에서 살아남을 수 없었다. 그나마 그가 여기까지 왔으니 저라도 살아남은 것인데. 레일린은 창살을 따라 붙잡고 주저앉은 이데르를 따라 무릎을 굽혀 눈높이를 맞추었다. 억지로 턱을 들어올려 마주한 얼굴은 살아남았다는 기쁨은 한 점 없는, 오히려 당장 목숨을 끊으라는 말을 들은 것 같은 절망만이 가득했다. 이런, 벌써 고장났나? 레일린은 영 반응이 없는 것에 조금 실망스러웠다.

 “이건 안으로 옮겨.”

고장났어도 고쳐놓으면 될 일이지. 레일린은 막 돌아온 경비들을 보자마자 붙들고 있던 것을 손가락질 하며 말했다. 그리고 차분히 새로 생긴 애완동물에게 붙일 이름을 고민해볼 계획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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