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약서는 꼼꼼히

 셀렌은 부탁받은 대로 제과점에서 미리 메뉴들을 주문했다. 계산한 빵이 담긴 트레이를 빈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올 사람들을 기다렸다. 최근에 맡은 의뢰를 완수하기 위해서는 그녀와 항상 함께 다니는 이지 외에도 다른 한 명이 더 필요했다. 목적지까지 적들의 눈을 피해 숨어들어가, 한 번 뻥 터뜨리고 나서 그대로 도주로를 따라 달아날 수 있는 그런 실력자가. 하여 언제나처럼 이지를 기다리고 있으려니 곧 익숙한 인기척이 느껴졌다. 셀렌이 앉은 옆 자리에 놓인 의자가 끼익 스치는 소리를 냈다. 한참 뒤에야 다른 의자도 마지못해 끌리는 듯한 소리가 났다.

 “우리 왔다~. 와 파운드 케이크! 아까 봤을 때 다 나갔길래 포기했는데 잘 선점했네.”

 이사벨라 그레이필드. 지금은 웬 하루 30개 한정 오렌지 파운드 케이크에 눈이 멀었지만, 셀라리움 아난데일의 눈이 되어주고 많은 부분을 보조해주는 오랜 동료였다. 비록 그녀를 위한 월급이 매달 제 지갑에서 엔간한 도시의 월세값이 빠져나갈지라도. 원체 그녀가 하는 일은 일반적인 비서의 수준을 훨씬 웃돌고 있었으니 어찌 보면 적당한 거래 관계라 할 수 있었다.

 “적당한 사람이 있긴 하던?”

 “딱 한 명. 계셔서 부리나케 모셔왔다.”

 “흠…….”

 셀렌은 이지가 말하는 방향과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었지만 여전히 알 수 없었다. 아까 전에 의자는 분명 두 개가 움직였음에도 그 두 번째 자리에 확신이 들지 않을 정도였다. 분명하게 그녀의 주변에서 다른 인기척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애써 집중을 높여야 간신히 무언가 한 가닥이 손에 잡힐 듯한 정도였다. 이 정도로 희미한 존재감은 처음이었다. 아니면 본인이 무의식적으로 숨기고 있거나. 게다가 여태 자기에 대한 얘기를 주고받는 것을 알면서도 한 마디도 하지 않는다, 라. 셀렌은 제 뒷덜미를 쓸어내렸다. 아무리 단 한 명만 있었다지만 저와는 상성이 잘 안 맞다 못해 이건…….

 “새로 데려온 분께서는 아예 말을 못 하나?”

 “아니? 아닌데. 아까는 대화……좀 했지!?”

 무슨 일을 하는지 말도 안하고 대뜸 사람을 끌고 오진 않았을 테니 어쨌든 최소한의 의사소통 정도는 했겠지. 말을 아예 못하는 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는 것으로 셀렌은 그에 대해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친목을 다지러 만난 사이도 아닌데 말수가 적은 걸로 뭘. 셀렌은 품을 뒤적거려 지갑으로 쓰는 작은 주머니를 꺼냈다. 분명 털가죽으로 만들어졌음에도 촉감이 미끄덩한 그 주머니는 이지가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아도 셀렌이 매우 아끼는 물건이었다. 여러 마법적 개조를 거쳐 말이 지갑이지 그 안에 든 것은 돈 뿐만이 아니었다. 그 중 하나를 꺼내려던 그녀는 가만히 테이블 위에 지갑을 내려두었다.

 “한 가지 정도, 확인해도 괜찮을까?”

 지금부터 하려는 것은 만의 하나라도 있을 위험을 피해갈 목적이었다. 셀렌은 옆에서 이지가 제 허벅지를 한 번 톡 치는 것을 알아챘다. 대강 상대방이 긍정하는 뜻을 표현했다는 것을 확인했다는, 그녀들 사이의 수신호였다. 의사도 확인했으니, 셀렌은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는 그 자리에 앉아있을 이에게도 일어나라 손짓을 해보였다. 낌새를 알아챈 이지가 목소리를 높였다.

 “야! 너 또!”

 “내가 뭘 알아야 말이지.”

 셀렌은 희미한 인기척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녀는 제 키가 또래보다 크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상대의 머리가 예상보다도 아래에 있다는 것에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 한 번 허공을 향해 헛손질을 했던 손이 어렵지 않게 상대의 작은 머리통에 안착했다. 몇 번인가 얼굴 윤곽을 만져보다가, 저한테 큰소리나 친 이지를 향해 고개만 돌리고서는 빽 소리를 질렀다.

 “너 지금 애를 데려왔어!?”

 “뭔 소리야! 성년인 거 확인했거든!?”

 “말이 돼!? 솜털이 보송한데?! 실례되는 소리 같아서 미안한데, 너 혹시 보스머거나 그러니?”

 셀렌의 손이 거침없이 얼굴을 주무르던 대로 어깨의 폭을 가늠하듯 턱 쥐었다가 급기야는 손까지도 주물렀다. 빵이라도 씹는지 우물거리는 목소리로 대꾸하던 이지가 기겁을 하며 셀렌을 뜯어말렸다. 너 진짜 그 정도면 성추행이랬지, 손 놔! 그 환장할 난장판에서 미약하게나마 느껴지던 인기척이 뚝 끊겼다. 이지는 셀렌의 멱살을 틀어쥐고 짤짤 흔들었다.

 “저것 봐, 저만큼 도망쳤잖아. 기껏 한 명이라도 구구절절 데려왔더니 이제 계약 안한다고 하면 다 네 탓이야.”

 “그렇다고 덥석 아무나 데려오는 대로 받아? 네가 헷갈릴 만한 사람을 데려온 게 잘못이라고는 생각 안 해?”

 “내가 말했지, 확인했다고. 안 믿을 거면 나를 왜 보내?!”

 연신 서로 쉭쉭거리며 말다툼을 해도, 어쨌거나 이지는 애써 모셔온 인재를 놓치지 않기 위해 애를 썼다. 이거 빵도 먹고. 따위의 말이 들려와 셀렌은 헛웃음을 지었다. 애쓴다. 그러나 더 놀라운 것은 생각보다 그 우스꽝스러운 제안이 먹힌 것 같다는 점으로. 셀렌은 비어있던 옆자리 의자가 삐걱 움직이는 소리를 다시금 들었다. 아까 만져본 인상으로나, 인기척으로나, 참으로 희미한 소리였다.

 “아까도 말했지만 얘가 눈이 안보여요. 그래서 손이 막 나가는 거니까 좀 이해해줘. 내가 사과할게. 이 케이크까지 다 먹어도 돼!”

 “내 돈으로 산 걸로 선심 꽤나 쓰십니다?”

 “네 건 하나도 없어. 조용히 해.”

 월권에 하극상까지 치밀하게 벌인 이지가 일부러 들으라는 듯 바삭바삭한 크로켓을 소리 나게 씹었다. 어이없어진 셀렌이 슬그머니 트레이로 손을 뻗었다. 손끝에 닿은 것이 무슨 빵인지 분간도 못할 잠깐도 못 참고 찰싹 손등을 세차게 얻어맞았다. 치사하게 이렇게 나올래? 보이지도 않는 눈으로 노려봐야 어떤 반응도 돌아오지 않았다.

 “그래. 맛있게 먹으면서, 계약서나 씁시다.”

 셀렌은 꺼내놓은 지갑을 도로 손에 잡아 그 안에서 어렵지 않게 여분의 계약서 용지 묶음을 찾아냈다. 그녀가 즐겨 쓰는 깃펜도 함께. 타자기가 없으면 간격을 맞춰서 글쓰기 어려운 셀렌에게는 꽤나 편리한 도구였다. 쓸 말을 미리 마력으로 지정하면 깃펜이 저장된 말을 그대로 주인의 필기체를 따라 작성해주는 기능을 달아둔 까닭이다. 잉크는 문자열을 저장할 때 딱 필요한 만큼 마력이 전환되어 깃펜에 흡수된다. 한 번 운용하는데 많은 마력이 필요하지도 않았다. 라는 기준은 셀렌 본인 생각이지만.

 하여 깃펜을 들고 늘상 써먹던 계약서 내용을 떠올린 셀렌은 2장 분의 마력을 실어 깃펜을 종이 위에 올렸다. 사각거리는 소리가 끝나길 기다렸다가, 그녀는 한 장을 자기가 가지고 다른 종이를 상대방 쪽에 넘겼다.

 “그러고보니 이름을 못 들었네.”

 “……세륀.”

 겨우 들은 목소리는 예상한 것처럼 나긋하기도 했고, 듣기 좋기도 했다. 셀렌은 작성이 끝난 계약서 중 한 장을 건네며 말을 꺼냈다.

 “좋아, 세륀. 그냥 이름으로 불러도 되지? 일단 통상적으로 쓰는 표준 계약서인데, 뭔가 더 보장이 필요한 사항이 있으면 추가할 수도 있고.”

 셀렌은 톡톡 계약서를 두드리며 이런저런 설명을 덧붙였다. 그럼에도 마땅히 돌아올 법한 대답이 없었다. 셀렌은 영문을 알 수 없었고, 급기야는 이지를 툭툭 건드리기까지 이르렀다. 그러나 보고 있었을 이지도 딱히 이유를 짐작하기 힘들었는지, 잘 모르겠다는 대답을 돌려주었다.

 “어려운 부분이 있으면 물어봐도…….”

 거기까지 말한 순간에, 셀렌은 멈칫했다. 그녀는 이지에게 세륀이 어떻게 있는지 물어보았고, 그에 대한 답을 듣고서 어쩌면 짐작이 맞을 거란 확신을 가졌다. 셀렌은 세륀이 앉은 자리를 톡톡 두들겨 주의를 끌었다.

 “한 항목씩 읽어줄테니 들어. 이해 안 가는 게 있으면 물어보면 되고.”

 그리고서는 등받이에 아주 비스듬히 기대앉았다. 팔락거리는 종이를 눈앞에 두었지만 딱히 셀렌이 그 종이를 읽으면서 말하는 것은 아니었다. 애초에 눈을 가릴 목적으로―보이지도 않는 눈이 뱀파이어가 된 후로는 햇빛에 노출되면 매우 시리기도 했다―천 하나를 두르기도 했고. 계약서란 것은 대개 내용이 다 거기서 거기니 눈에 익으면 외우기 마련이고, 속일 수 있는 것도 없었다. 그런 짓을 하는 놈팽이들이 있다는 건 안다. 그러나 뭐가 아쉬워 그런 짓을 굳이.

 “제 1조. 본 계약은 팔크리스 영지 내부의 길 안내를 맡을 자와 체결하는……그러니까, 계약을 맺는다는 뜻인데.”

 “잠깐.”

 “또 뭐가 이해 안 돼?”

 셀렌은 잠깐 의문이 들었다. 첫줄은 그저 계약의 목적만 명시하는 편이었다. 딱히 어려울 게 없는데……. 하던 찰나.

 “길은, 잘 몰라. 숨어 다니는 것 정도만.”

 “……이사벨라.”

 “이건 나도 지금 알았어.”

 하. 셀렌은 지끈거리는 두통에 저도 모르게 깊은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이걸 어쩐다. 애초에 후보에 오른 인물이 한 명뿐이었다 했지. 그럼 아예 다른 대안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 셀렌은 여러 대책을 순식간에 세웠다가 그만큼 빠르게 무너뜨렸다. 원래 그녀는 딱히 계획을 세우는 타입도 아니었다. 목적지까지 들어가서, 대형 마법을 폭발시켜서, 뻥 터뜨리고, 그대로 튀면 되지. 길쯤이야, 뭐, 운으로 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 아니다. 생각하지 말자.

 “좋아. 이건 이따 바꾸기로 하고. 그럼. 다음. 제 2조.”

 줄줄이 이어지는 조목들은 거의 다 계약하는 양측 간의 권리 보장과 각자가 해야 할 의무를 길게, 다른 말로, 여러 번 중첩해 쓰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명백하게 몇 줄 쓰는 것으로 그칠 수도 있지만 사람들은 믿지 않거나, 어떻게든 행간 사이를 이용하려 들었다. 남들이 안하는 데는 다 이유가 있지. 마지막 항목까지 성실하게 소리 내어 읽은 셀렌이 팔랑 테이블 위에 종이를 내려놓았다. 그러자 맞은 편에서 같은 걸 읽고 있었을 세륀이 툭 말을 내뱉었다.

 “너무 길어.”

 “나도 그렇게 생각해. 그런데 다 필요한 일이어서.”

 입가를 손가로 톡톡 두드리면서 생각에 잠긴 셀렌이 다시 깃펜에 숨을 불어넣었다. 하나 정도는 더 넣어도 좋을까 싶었다.

 “특수 조항 하나만 더 넣자. 내가 물어본 말에 최소한 그렇다 아니다 대답은 해줄 것.”

 “에엥?”

 여태 잠자코 듣고만 있던 이지가 이상한 소리를 내었다. 하지만 언제까지고 이지를 거쳐서 대화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 셀렌은 확고하게 두 계약서 여백에 새 조항을 넣었다. 그에 이지가 황당한 말을 더 꺼냈다.

 “그럼 세륀도 뭔가 더 요구해! 대답 하나당 그거 파이라든가!”

 “이건 또 뭔 소리야.”

 “그럼 귀한 대답 그냥 날로 먹게? 뭐든 걸어 뭐든! 얘 돈 많아!”

그러니까 내 돈을 왜 댁께서 자랑을 하시냐고요. 셀렌은 어이없어서 말도 나오지 않았다. 더 기가 막힌 것은, 파이가 좋다고 중얼거리는 소리를 듣고 만 것으로. 그녀는 몇 번이나 더 확인하고서도 믿기지 않는 손으로 추가 사항을 더 달아 놓았다.

 “대답을 들으면, 파이 한 조각……아니 무슨 8개 모으면 한 판이야?”

 “뭐 어때? 8번 대답하면 파이 한 판이래 좋지?”

 “……괜찮아.”

 “차라리 돈을 달라고 해.”

 그렇게 파이 쿠폰판이 되어버린 계약서에 곱게 두 사람의 서명이 들어갔다. 기가 막힐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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