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 휴일

 사피는 눈을 느리게 깜박였다. 기억 속에만 존재하던, 익숙하지 않은 아침 햇빛이 눈에 부셨다. 스스로가 밤에만 머무르는 것을 딱히 유감스럽게 받아들인 적도 없고 그 또한 분명하게 ‘사피라드 발루아’임에도 그러했다.

 아마도 그 까닭은, 굳이 호칭으로 구분 지으려고 애쓰는 옆자리의 남자 때문이겠지만.

 “일어나 라밀. 아침이야.”

 “…….”

 나일미르는 사피가 본 중에 가장, 실용주의에 무척이나 심취한 엘프가 틀림없었다. 그는 굳이 입을 열어 뭐라고 대꾸하는데 기력을 쓰는 대신에, 사피의 허리에 팔을 감아 끌어당기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게다가 사피가 저항도 하지 못하고 제 품에 그대로 안기기까지 했으니, 그에게는 퍽 만족스러운 결과일 것이다. 느지막한 아침의 시작으로.

 “하려던 게 많은 거 아니었어? 오늘 해가 지기 전까지.”

 어제 밤새도록 나일미르가 사피를 흐느껴 울게 만든 원인이었다. 어떻게든 한 번만 들어주면 안 되냐고 애원했다가, 그게 그렇게 어려운 일이냐고 몰아붙였다가―나일미르가 세게 나올 때 사피는 곧장 들어주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다시 어린아이처럼 매달리길 반복하던 한밤중에. 더는 견딜 수 없었던 사피는 나일미르의 말대로 하겠다고 간신히 선언했다. 고작 하루뿐인 시간에 불과한데도 나일미르는 원하던 선물을 받은 아이처럼 즐거워하는 얼굴로 사피를 끌어안고 만족스러워했다. 사피는 지친 몸을 나일미르에게 맡긴 채 뭘 하고 싶은지 하나하나 늘어놓는 목소리를 자장가처럼 듣고만 있었다.

 하고 싶은 게 많은 것치고는 너무 느긋한 게 아닌가. 사피가 빤히 나일미르를 올려다보니 시선을 끝내 무시할 수 없었던 것인지 졸음이 묻어나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이게 내가 하고 싶었던 거야.”

그리고 사피도 자게 해달라고 내내 말했잖아. 한쪽 눈만 실눈처럼 슬쩍 뜨고 사피를 내려다보던 나일미르가 몹시도 뻔뻔한 소리를 해댔다. 사피가 그 말을 한 것은 사실이었다. 그리고 그를 재울 생각 없이 계속해서 깨워대며 뒤흔들어 놓은 것도 나일미르였다.

‘아직 자긴 이르잖아. 눈 뜨고 날 똑바로 봐.’

같은 소리나 해댔지……. 급습해오는 전날 밤의 새빨갛게 달아오른 기억이 다시 살아나는 것과 동시에, 딱히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사피는 어느새 나일미르의 허리에 세차게 주먹을 내지르고 있었다. 그가 악, 하고 별로 아프지도 않게 들리는 신음소리를 내도 사피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어차피 허리를 감싸고 둘러진 팔이 풀어지지도 않았다. 꼼짝없이 아침의 햇빛은 침대 위에서 쬐어야 할 듯했다. 어느 정도는 기대라는 것을 약간이라도 갖고 있었다는 것을 밀려오는 실망이 절절하게 증명했다. 누굴 탓할 수 있을까. 하기는, 나일미르의 하루 시작이 늦다는 것을 간과한 스스로의 안일함이 제일 큰 문제였다. 사피는 뻔뻔하게도 고른 숨을 내쉬는 나일미르의 입술을 길게 잡아당겨버리고 싶은 충동을 겨우 접어 넣었다.

 책이라도 가져와서 읽기엔 나일미르가 끌어안은 팔이 도무지 풀리지 않았다. 그렇다고 사피는 다시 잠들고 싶지도 않았다. 그 망할 종이라도 있으면 아예 잠들어버릴 수 있을 텐데. 그는 나일미르가 또 다른 자신에게 뭘 먹인 것인지 조금쯤은 궁금해졌다. 뭘 어떻게 하면 본래 일어날 시간에도 일어나지 못해서 교체되지 않게 막아버린 것인지. 사피는 그가 담당한 시간대 뿐만 아니라 다른 시간대에 있던 일도 기억하고는 있었다. 그렇다고는 해도 당시에 보고 들어야 할 당사자인 사피라드가 전혀 이해하지 못한 것은 그 또한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전후에 있었던 일로 유추해보자면, 딱히 알아서 좋을 것도 없을 게 확실했다.

 

 

 몇 번째인가, 사피는 눈을 감았다 떠도 똑같은 풍경이 비치는 것이 이제는 제법 지겨웠다. 너무 지루한 나머지 잠이 오지 않을 것 같아도 얼핏 잠들었다 일어나고 있었다. 나른한 햇빛. 뜨끈한 옆 자리. 푹신한 이불과 침대 시트가 명료한 사고에 심각한 방해를 일으키고 있었다.

 확실히 이정도면. 나일미르가 아침마다 영 일어나기 싫어하는 것도 어느 정도는 이해가 될 것도 같았다. 어디까지나 이해는 할 수 있을 뿐이다. 또 다른 그는 이보다 더 이른 시간에 하루를 시작했으니까. 개인차가 있을 수도 있지만 편차가 너무 크지 않은가.

 “언제 일어날래.”

 모르긴 몰라도 이제 오전과 오후의 경계쯤 되는 시간일지도 몰랐다. 언제 시계를 눈에 띄는 곳으로 갖다 놔야겠다. 또 다른 그는 기억 못하는 사이에 또 물건이 옮겨진 것을 불편해할 수도 있겠지만, 그런 건 다 나일미르의 탓으로 미뤄두어도 되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 또한 그만큼의 양심은 있을 것이다. 아마도.

아닐지도.

 1분도 안되어 사피는 제 주장을 뒤집어야 할 것 같았다.

 “…….”

 내용물이야 어쨌든. 대답도 안 할 만큼 인사불성인 것치고. 나일미르는 자는 얼굴조차 수려했다. 이 또한 몹시 뻔한 전개 아닌가. 사피는 다른 자신이 자주 찾아 읽는 흔한 전개의 글줄들을 떠올렸다. 사람이 다른 사람과 만나 당연한 듯이 사랑에 빠지는 그런 것들 말이다. 어떤 상황에 있는 사람이건 상관없이, 모든 인물들이 다른 이들을 만나 변화했다. 그 중 가장 극적인 변화를 일으키는 감정은 분명 그런 종류의, 불꽃같은 감정들이었다.

 어떤 불합리하고 비이성적인 일들도 사랑이라는 감정 하나면 놀랍도록 개연성을 얻었다. 읽는 이들에게도 그만큼 열광을 일으켜냈다. 그런 감정을 불러일으키는데 외모는 때때로 중요하지 않았다. 하지만 기왕이면 보기 좋은 것이 더 예쁨 받는 법이었다.

그런 점에서 나일미르는 확실히 상당한 어드밴티지를 갖고 있는…….

 “그래서, 몇 점인가요?”

 “……잠꼬대하니?”

 “사피가 먼저 점수를 매기는 표정을 하고 있었잖아요.”

본선 진출은 했다고 생각하지만. 일어나자마자 제법 뻔뻔한 소리를 하면서, 나일미르는 이제 일어난 사람 같지 않게 졸음이라고는 없는 모습으로 몸을 일으켰다. 자는 사이 눌리고 부스스해진 나일미르의 검은 긴 머리카락이 그나마 인간적으로 보일 정도였다.

 어깨를 넘어 가슴까지 흘러내리는 머리카락을 번거롭다는 듯 휙 넘긴 그가 아직 몸을 일으켜 세우지 않은 사피를 내려다보았다. 언제나처럼 지긋하게 관찰하는 푸른 시선을 오래 받아넘기지 못한 분홍색 눈이 일없이 창가로 향했다. 딴청부리듯 구는 사피를 굳이 직접 부르지는 않고, 나일미르는 되는대로 풀어헤쳐진 사피의 연갈색 머리카락에 손을 집어넣어 빗질하듯 쓸어내렸다.

 “우선은, 당신 머리카락부터 정리해야겠네요. 그 다음에 밥도 먹고.”

 “마음대로.”

 이렇다 할 의견을 갖고 있지 않으면 의견을 내는 쪽의 말을 듣는 것이 나았다. 사피는 나일미르가 내미는 손을 기꺼이 붙잡았다. 침대에서 주르륵 미끄러져 바닥에 닿는 맨발에 닿는 러그가 몹시도 푹신하기만 했다. 서늘하지도 않고. 간질간질하기만 해서.

 어쩐지 붕 뜬 기분이다. 그것이 분명 착각은 아닐 터였다. 모든 게 익숙하면서도 한편으로 낯설어서. 그리고 당연한 것처럼 환한 빛 아래 나일미르가 옆에 있어서. 흘끗 올려다본 그 얼굴은 어딘지 들떠있는 듯도 보였다. 고작 이런 거 가지고. 아무래도 고작이라고 표현하기에는 지금 이 때 자기가 전면에 존재하는 것은 여러 세심한 장치가 필요한 사건이긴 했어도. 여하간 거울을 놓은 책상 앞에 앉아서도 거울에 낱낱이 비치는 사피의 표정은 영 심란하기만 했다.

 “오늘도 늘 하던 대로 할까요?”

 “……그래.”

 불을 켜지 않고도 환한 방에서, 사피는 촘촘한 참빗으로 곱게 머리카락을 정돈하는 나일미르의 손길을 가만히 받았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어딘가 어색한 것을, 자꾸만 지금 이렇게 땋는 게 괜찮은지 저렇게 묶는 게 괜찮은지 물어보며 거울을 보게 하는 것이 가장 난감했다.

 본다고 알 수 있을 리도 없었거니와, 사피는 여전히 거울 속에 있는 스스로의 얼굴이 자기 것인지 확신이 들지 않았다. 복잡한 모양으로 연갈빛 머리카락을 이리저리 땋아 내린 나일미르가 만족한 표정으로 손을 놓았다. 완벽한 대칭으로 잘도 꼬아놓은 것을 더듬더듬 매만지던 사피는 온 얼굴로 마음에 흡족하다는 표정을 짓는 거울 속 나일미르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일 따름이었다.

 “그럼 이제 식사하면 되겠네요. 우선 내려갈까?”

 나일미르가 공대와 편한 어조를 오가는 것은 예삿일이긴 했다. 깍듯하게 예의를 차리는 것이 몸에 배어 있긴 하지만, 그것이 사실은 의식적으로 하는 일이라면. 하여 완벽한 절제와 행동 속에서 이따금 튀어 오르는 가벼운 모습들이 실은 이 엘프가 남들도 으레 겪는 웃고 울고 즐거워하고 괴로워하는 성장 과정을 제대로 밟았더라면 될 수 있는 본 모습이라면.

그걸 왜, 내가 신경을 쓰지?

왜?

 굳이 따지자면 어색함. 아니면 불안함. 사피가 대체로 나일미르에게 느끼는 감정은 그런 종류였다.

 연민은 그가 가질 것이 아니었다. 아무 사람에게나 온정을 주기 좋아하는 ‘사피라드 선생’이나 실컷 가지라지.

 그런 것은 불필요한, 실로 사소한 감정들일 뿐. 사피는 아무 내색 없이 나일미르가 이끄는 대로 식탁 앞으로 걸어갔다. 나일미르의 완벽한 에스코트에는 흠잡을 구석도 없었다. 의자까지 손수 끌어내어주자 사피는 조금 거북한 마음이 되어 다소 표정을 찡그린 채로 앉았다. 이래서야 마치―. 마치, 뭐? 사피는 무언으로 마음을 잘라내듯 나일미르에게서 고개를 돌린 채 식탁 위를 딱딱 손톱으로 두드리기만 했다. 나일미르는 사피의 행동에 딱히 신경 쓰지 않는 듯, 스스로 식탁을 차리려는 것처럼 화덕에 불부터 올렸다.

 “웬일로?”

 “데우는 것 정도라면 저도 할 줄 알거든요.”

 언제나처럼 화덕 위 단지에는 세 사람이 먹고도 남을 양의 스튜가 가득했고, 어디 있는 상자 안에는 갓 딴 과일들도 충분히 많을 것이다. 아침식사로 삼기에 딱 좋은 것들 뿐. 그럼에도 사피는 테이블 매트가 자기 앞에만 깔리고, 식기도 딱 한 벌, 모락모락 김이 오르게 데워진 스튜 한 그릇도 자기 앞에만 놓일 즈음에 그는 자연히 팔짱을 끼고 불만스럽게 한 마디 툭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이게 지금 뭐하는 거야?”

 사피가 날카롭게 짜증을 부려도 나일미르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서 사피의 맞은편 자리에 앉아 천연덕스럽게 대꾸했다.

 “뭐가요? 먹고 싶은 거 아니었어요?”

 “나는 됐고. 너 말이야.”

 “저요?”

 사피가 짜증을 내도 나일미르는 태연하게 웬 주머니를 꺼내들었다. 사피의 눈에도 익숙해질 정도로 자주 본 그 주머니 안에는 나일미르가 스스로 연금술로 조제한 여러 물약들이 들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 안에서 꺼내들 것이 쉬이 짐작된 사피는 눈을 찡그렸다. 너 또. 아니나 다를까, 나일미르가 그 안에서 꺼내든 물약은 익히 본 색깔의 약병이다.

 “이거 한 병이면 다 해결되는걸요.”

 “내가 그거 최소한으로 쓰라고 했지.”

 “그래요. 그래서 하루에 한 번만 마시잖아요.”

점심에 한 번. 자랑이라도 하듯, 늦게 일어나는 탓에 자연히 아침 식사는 거르는 나일미르가 얄밉게도 말했다. 여차하면 무기로 휘두르는 만면의 미소와 함께. 그는 어떤 쪽의 ‘사피라드 발루아’이든 그런 자기 얼굴에 약해지는 걸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나일미르는 겉으로 보이는 것처럼 긍정적인 수식어―말하자면 〈착실하다〉거나 〈순진하다〉같은―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이용가치만 있다면 자기의 어떤 면이든 바로 써먹을 수 있을 만큼 영악했고, 스스로를 가장 위하는 것 같아도 전혀 그렇지 않았다. 얼굴값을 할 줄 아는 거지. 다른 쪽의 자신은 농담 섞어 그리 말할 것을 사피도 알고는 있었다. 눈으로 보기에 탐스럽기도 하고 먹음직스럽기도 하니 주변에서 얼마나 가만 내버려두질 않았겠나.

 사피는 다른 면의 자기가 가진 의견에도 충분히 동의할 수 있었다. 애초에 그쪽이 주된 인격인 이상 사피는 그것과 상반되는 의견은 가질 수는 없었다. 하지만 태생적으로 가지게 된 결함 같은, 불안정함을 품고 있는 탓일까. 그는 나일미르가 여럿 가지고 있는 자기 파괴적인 면까지 좋게 볼 수는 없었다.

 “내가 보고 있을 때는 제대로 먹어.”

 “알았어요, 알았어. 깐깐하게 굴기는.”

 장난스럽게 눈을 흘기던 나일미르가 다시 의자를 끼익 뒤로 빼며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는 사피에게 해주었던 것보다는 조금 거칠고 단순하게, 한 번에 한 움큼 가지고 온 테이블 매트와 식기들을 자기 앞에 와르르 펼쳤다. 시위하는 건가. 사피는 나일미르가 마저 더 이상 김은 나지 않는 스튜 그릇을 들고 오는 것을 차게 식은 눈으로 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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